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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ee May 03. 2018

카카오톡 이모티콘을 만들어보았다

퇴사하고 저지른 첫번째 뻘프로젝트

프리비어스 스토리


미세먼지와 황사가 휘몰아치는 황량한 21세기 조선의 봄.

대책 없이 비경제활동인의 처지에 던져진 나는 기왕 이렇게 경제적으로 신분하락해버린 마당에 그냥 하고 싶은 일을 하기로 한다.

모르십니다

그런데 하고 싶은 일이 4세 아동의 호기심만큼 많아서 발만 담궈도 흘러넘치는 욕조 같은 상태가 된다. 모든 시간이 다 내 시간이 되니 1분 1초가 아까워지자 하고 싶은 걸 조금씩 다 시작해버린 뒤 혼돈의 카오스 상태에 처하고, 퇴사 후 단 하루도 제대로 쉬어본 적이 없는 기묘한 상황에 놓이게 된다.

이대로는 백수로서 진정한 기쁨을 누릴 수 없을 것이란 걸 깨닫고 회사 생활 동안 쟁여놓은 기량을 발휘해 일의 우선순위와 마감을 정하기에 이른다. 욕망의 정도와 빠른 마감을 통한 성취감 고취 가능성을 고려해 가장 첫 프로젝트로 정한 것이 바로 이모티콘 그리기였다.


승인 대기중인 나의 오이들


나는 사실 약도를 그리고 싶었어


오늘도 중고로운 평화나라, 평화로운 중고나라를 기웃거리다가 와콤 뱀부 펜 모델을 4만원에 쿨거래하면서부터 이 모든 게 시작됐는지도 모르겠다. 내가 태블릿을 구입하게 된 이유는 딱히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나는 사진 찍는 걸 정말 귀찮아 하는 사람인데 여행기를 쓰고 싶어하는 습성이 있다. 요즘같은 시대에 사진 없는 여행기라는 말도 안 되는 결과물을 낳을 수는 없기에 대충 약도라도 그려 넣어보자는 생각으로 태블릿을 샀다.  

장비 업그레이드 하고 싶습니다... 다음 생에 가능한가여


그런데 여차저차 태블릿을 가지고 놀다보니 오히려 약도보다 그림을 그리는 게 더 쉽고 재밌었고, 약도에 대한 욕망은 점차 내 머릿속에서 깨끗이 삭제되기 시작했다. 처음엔 뱀부 페이퍼나 스케치북이라는 무료 프로그램으로 그리다가 해상도에 대한 좌절감이 깊어질 무렵 나는 포토샵 cc 정기 결제를 덜컥 질러버렸고 다달이 디지털아일랜드에서 돈을 가져갔다는 문자를 보내오니 의무감에라도 포토샵을 켜기 시작했으며, 그러다보니 뭐라도 그려야겠고 뭐 그리다보니 몇 몇 개는 사람들을 웃길 수 있었고, 잘그리진 못해도 뭔가 약간의 자신감을 얻게 됐고 꾸준히 그리고 싶어졌고 그런 식의 테크트리를 타고 있었다.

내 첫 그림 모델인 친한 고양이 몬타나

그러던 와중 주변 사람들이 이모티콘을 한번 그려보면 어떻겠냐는 말을 봄바람에 침 묻히듯 호롤롤로 내뱉는 걸 주워담았는데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새 나는 기획을 하고 있었다. 게다가 요즘 카카오톡 임티 시장이 잘그림과 못그림으로 판매의 갈림길에 서지 않는다는 것을 목도하면서, 에라 모르겠다 목적이 없는 것보단 목적 있는 그림이 낫겠다 싶어 이모티콘 만들기에 한번 도전해보기로 했다.  


그림 처음 그리기 시작했을 때의 첫캐릭터 고양이 몬타나


왜 채소인가, 왜 오이인가?


콘텐츠 기획자나 크리에이터들에게는 기획을 낳는 식스센스가 있는데, 아아 이건 다 개뻥이다. 그냥 누구든지 무언가에 관심이 있으면 관심 있는 만큼 시야가 커진다. 대학에서 연극 동아리를 하던 시절, 지금은 방송국 피디가 되어 있는 내 첫 연출언니는 길을 가다 우연히 마주친 쓰레기 더미에서 멀쩡한 소품을 건져오고는 했다.

내가 오이를 만나게 된 것은 넷플릭스에서 때늦은 '닥터 스트레인지' 감상을 하면서였다. 수도 없이 쏟아져나오는 동물 캐릭터들 사이에서 차별적인 뭔가를 대충 고민하던 나는 닥터스트레인지의 잘생긴 오이 오빠의 얼굴을 본 순간 무릎을 탁 쳤다. 그래 오이였어.

단순 팬심으로 그린 닥터스트레인오이지

우리 오이로 말할 것 같으면 페이스북에 ‘오이를 싫어하는 사람들’의 모임이 있을 정도로 미움을 받는 캐릭터이다. 존재 자체로 미움을 받아버리니 뭔가 실드를 쳐주기도 애매하다. 내가 아는 한 개발자는 냉면에 오이가 '묻으면' 그 냉면 자체를 먹지 않는다. 내 동생은 오이 냄새가 역해서 먹지 않고, 먹는 게 특기인 내 남자친구는 오이와 피클만큼은 거부한다. 이렇게 타고난 특성 때문에 미움을 받으면 기분이 어떨까?

오이 첫 스케치. 디 오리진오브오이

이 쩌리같은 오이의 성격이 결정되자 친구들도 생겼다. '고기' 음식이 주류인 세상에서 소외받는 채소 친구들. 정체성에 혼란을 겪고 있는 토마토, 버릇 없는 짱구로 인해 어린이 기피 음식의 대명사가 된 피망, 주변 사람을 눈물나게 해서 거리감이 드는 양파, 흐물흐물 거려서 어딘지 기분나쁜 가지 등등. 하지만 인간의 영양 상태의 균형을 책임져주는 영웅들. 어쩐지 요즘 히어로 트렌드와도 맞물리는 스토리라인.

아 다 됐고, 그냥 조금 웃긴 것 같고 아직까진 없는 것 같은데 해볼 수 있을 것 같아서 시작해봤고, 드디어 어제 카카오 이모티콘스튜디오에 등록했다.


안 팔려도 괜찮어 즐거웠어


현재 카카오톡에는 안 움직이는 이모티콘으로 24개를 제안 신청 해놓은 상태이고, 라인과 아이메시지는 한국어로 낼 생각이 없기에 약간 변형된 형태로 번역 런칭을 도모하는 중이다. 텔레그램에서도 한번 써볼 생각이다. 카카오톡은 승인되고 판매되기까지 다른 플랫폼에 비해 꽤 길다고 한다. 카카오나 다른 데나 승인 거절을 당해서 세상의 빛(자본의 빛)을 보지 못할 가능성이 크기도 하다. 건투를 빈다, 어딘지 우울한 나의 오이들.

참아 이자식아.. 잘보여야대

안 팔려도 괜찮고, 검수에 통과되지 않아도 괜찮다. 그저 퇴사 후 첫번째 프로젝트로서 좋은 경험이었다는 것에 의의를 둔다. 우선 아무 것에도 얽매여 있지 않은 상태에서 스스로 시간과 프로젝트 관리를 할 수 있겠다는 자신감을 조금 얻었다. 그림 실력이 전보단 조금 늘었고, 포토샵 활용 능력도 전보다 늘었다. 최근 트렌드를 익히는 소중한 시간이었으며, 무엇보다 하는 동안 즐거웠다. 물론 누구도 뭐라하지 않았지만 나름의 '마감'이 있었기에 마감 때는 피곤했다. 나란 인간, 사서 고생이랄지, 유난 떤달지, 하여튼 마감에 고생하는 건 왜 회사 다닐 때나 안 다닐 때나 똑같은가! 마감은 자본주의의 꽃이자 욜로의 적인가! 중립국, 중립국은 어디인가!

보라카이..?

뭐 약간의 욕심이 있다면 한 천 원만 벌어보면 좋을 것 같다. 지인 팔이로 천원은 때울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속마음을 살짜쿵 밝히며 나를 알고 계시는 지인분들께 미리 감사드립니다. 어디선가는 나의 오이가 자유롭게 날아다닐 그날을 기대하며 나는 다음 뻘짓을 기획해야겠다.


백수가 과로사한다고 1분1초가 전부 내 시간이라 아깝고 행복하고 바쁜 퇴사 라이프는 통장 잔고가 위태로워질 때까진 계속된다. 다음 뻘짓을 기대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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