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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ee Nov 05. 2018

감정을 돌본다는 것

뭐라도 쓰기 3일차

'세상이 이러니 어쩔 수 없지'라는 생각이 끝내 못 찾아낸 버그처럼 내 머릿속에 계속 남아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그 작고 간단한 생각 하나가 나의 성장을 저해하고 진실을 가리고 있었으며 지독한 두통을 만들고 있었다.

서른 넘어서도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줄 몰랐지만, 알고보니 나는 이십대 때랑 다름 없이 지금 나를 둘러싼 사회적 규칙의 상당부분을 싫어한다. "이러이러해야 돼"라는 사고 방식과 기준을 혐오한다. 그건 아주 일상적이고 사소한 것부터 조직적이고 큰 것까지에 걸쳐 존재한다. 그리고 아주 너무 뻔한 것들이다.

예를 들어 결혼식에 입고 갈 옷을 고르는 알고리즘이 있다면, 이 사회에서 도출되는 결과값은 거기서 거기다. 왜냐면 '결혼식'이라는 조건이 붙어 있고, 이 조건이 의미하는 것은 '잘 차려 입는 것'이며 '잘 차려 입는 것'은 사회적 시선에 의해 정의되기 때문이다. 그럼 사회적 시선으로 정의된 '잘 차려 입는 것'은 여성들에겐 블라우스, 원피스 따위의 옷일 테고, 애초에 후드나 트레이닝복 같은 편한 옷은 배제된다. 하지만 난 원피스나 블라우스보다 편한 옷이 좋은 사람이기 때문에 '결혼식에 입고 갈 옷'이란 게 존재하게 되는 규칙조차 싫은 거다. 이건 너무 사소한 규칙 중 하나라서 종종 그냥 무시하기도 한다.

좀 더 큰, 회사에 다니는 문제를 생각해보자. 일이 좋든 싫든 나는 출퇴근 길에 사람들에 치여 대중교통에 오르기 싫고,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보다 혼자 있는 것을 더 좋아하며, 8시간이나 한 공간에 묶여 있는 것도 이상하고, 반복되는 회의, 미션 없는 실행이 주는 고통, '하라고 해서' 하는 일들도 싫어한다. (혹시 나의 전현직 직장 동료들이 볼까봐 적어두는데 당신들이 그렇다는 얘기가 아니여요...)

문제는 내가 이것을 '바꿀 수 없는 것'이라는 전제를 두고 모든 선택을 하기 때문에 벌어진다. 나는 그것 중 어떤 것들은 싫아하고 힘들어 하는 감정을 가지고 있는데, 이 일은 '해야 되는 일'이므로 싫어하고 힘들어하는 감정을 무시한다. 싫어도 해야 하고 힘들어도 해야 하니까 고통을 덜 느끼기 위해 감정을 피한다. 그리고 그것이 나에게 어떤 데미지를 주는지 생각하지 않은 채 '해야 된다'는 불변의 전제를 두고 그 굴레를 벗어나지 못한다.

어느 날부터 나는 심한 두통에 시달리기 시작했다. 트리거가 무엇인지는 모르겠는데, 한번 두통이 시작되면 미친듯이 지끈거렸고, 쓰러질 것 같이 현기증이 나는 것 같은 기분까지 들었다. 어떤 퇴근 길에는 정신이 빠진 사람처럼 말도 잘 나오지 않고 잘 들리지도 않았다. 누워 있고 싶었고 잠만 자고 싶었다. 막상 잠을 청하면 숙면을 취하지도 못했다. 뭔가 잘못됐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어제 누군가와 이야기를 하다가 깨달았다. "너는 감정을 말하기 전에 이미 '이건 이러니까 내가 뭐 어쩔 수 없지'라고 먼저 차단해"라는 말을 듣고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그런 것 같았다. 그렇게 살아온 것 같았다. 수많은 심리학 강의와 책이 '감정을 돌보라'고 말할 때 나는 감정을 돌보라는 게 도대체 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리고 나는 감정 표현을 잘한다고 착각하기도 했다. 그런데 내가 돌보지 않은 감정들이 쌓이고 쌓이자 몸으로 터져나오기 시작했다. 몸이 이제 아프다고 그만하라고 말하고 있었다.

예전에 출판사에 근무할 때 강의를 책으로 만들려고 일주일에 한 번씩 들으러 다니던 강의가 있다. '감정'에 대한 심리학 강의였다. 교수님이 너무 젠틀하고 강의도 재밌었다. 그 강의에서 교수님은 사람들이 감정을 잘 돌보지 못하다가 그게 엄한 데서 터진다고 했다. 분노의 감정을 느꼈는데, 그걸 제대로 해소하지 못하면 갑자기 화분에 물 주다가 화를 내는 상황이 벌어지는 것이다.

이제는 감정을 돌보는 게 뭔지 조금은 알 것 같다. 이제 다시 시작할 것이다. 만약 내가 정말 싫어하고 힘들어하는 게 있다면, '해야 된다'는 기준을 들이대기 전에 싫어하고 힘들어하는 내 마음을 달래주기부터 할 것이다. 그 기준이 너무나 당연하고, 그것을 거부했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질 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너무나 익숙한 것이라 하더라도, 내 마음의 정당한 거부반응을 인정해줄 것이다.

100만큼의 에너지 중 내가 80만큼의 에너지만 들여도 할 수 있는 일이 있는 반면, 120을 들여야 하는 일이 있을 수 있다. 내가 120을 들여야 하는 일을 80만 들여도 거뜬히 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저마다 불편하게 느끼는 것과 편안하게 느끼는 것이 다르다. 하지만 다양성이 포용되지 못하는 한국 사회는 어느 시기에 어떤 걸 잘해내지 못하거나 어떤 걸 거부한다는 것을 '철 없음'이나 '능력 없음'으로 치부한다. 나는 이제서야 다양성의 부재가 얼마나 심각한 문제인지, 새삼 더 깊게 공감하고 좌절한다. 이 문화와 사회가 얼마나 많은 좌절감을 양산해냈는지를 실감한다.  

지금이라도 나의 문제를 알게 돼서 다행이다. 문제는 해결하면 된다. 문제를 모를 때가 문제다. 이제 나는 내 감정을 돌봐줄 것이다. 아무리 부끄러울 만큼 나이브한 생떼 같이 느껴지더라도, 나는 내가 힘들어하고 싫어하는 모든 것이 '그래도 되는 것', '그럴 수 있는 것'이라고 스스로에게 말해줄 것이다. 내가 이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는 이상한 사람이라서 그런 게 아니라, 그럴 수 있는 거라고 다독여줄 것이다. 그게 장기적으로 나의 건강과 성장에 더 큰 도움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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