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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ee Nov 20. 2018

이야기는 죽지 않는다, 진화할 뿐.<스토리텔링 애니멀>

뭐라도 쓰기 19일차

아마존의 제프 베조스는 "변하는 것"이 아니라 "변하지 않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는 "사람들은 싸고 편한 것을 좋아한다"는 사실이 변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걸 좇다 보니 아마존 제국이 만들어졌다.


인간에게 "변하지 않는 것"이 또 뭐 있을까? 팬티를 입을 때 한 다리부터 집어넣어야 한다는 것? 나를 낳아준 부모와 다른 시대를 살 수밖에 없다는 것? 생각하자면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콘텐츠 업계에 종사하는 사람으로서 내가 주목하는 것은 바로 이야기에 대한 집착이다. 그리고 책 <스토리텔링 애니멀>은 인간이 절대로 이야기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유쾌하고 집요하게 밝혀내는 책이다.  


'인간의 생존과 진화에 아무 필요가 없었다면 이야기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란 의문부터 시작된 저자의 탐구는, 인간의 역사와 문화를 훑으며 이야기의 세계에 잡아먹힐지도 모르는 미래에 대한 걱정까지 이어진다. 즉 이야기는 없어지지 않을 것이며 그 형태가 변화할 것이란 주장이다. 지금도 그래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며, 오히려 퇴근 후 가상현실 세계에 접속하는 식으로 이야기에 지배당할 수도 있다고 지적한다.


이 책에서 말하는 이야기는 '픽션'인데, 어떤 물성 있는 장르를 말하는 건 아니다. 즉 소설, 웹소설, 영화, 연극 등의 장르가 아닌, 어떤 인물 혹은 의인화된 동식물이 존재하고, 그 존재가 말썽을 겪으며 그 말썽에서 탈출하려는 시도를 보이는 구조를 가진 이야기를 말한다. 우리가 읽는 실제로 성공한 사람의 이야기는 모두 이런 구조를 가졌다. 우리가 보는 리얼리티 프로그램도 이런 구조를 가졌다. 내가 스스로 생각하는 내 인생도 이런 구조 안에서 움직인다.


사람이 이야기를 잃을 수 없는 이유는 그것이 우리의 모든 규율과 신념 체계를 형성하기 때문이다. 또 그것이 우리의 기억에 영향을 미쳐 개개인의 서사를 만들기 때문이다. 이야기의 세계는 네버랜드이며, 우리가 사회에 잘 적응하고 살 수 있도록, 혹은 사회에서 소외되더라도 생존해갈 수 있도록 하는 기능을 한다.


태초에 사회를 규율하는 역할을 한 이야기는 종교적 신화들이었다. 기독교, 불교 등 지금 설명할 수 있는 종교의 이름으로 표현되는 것들 외에도 수많은 민담들, 설화들은 이야기 형태로 구전되며 우리에게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가르쳤다. 이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이야기에 반응하는 것은 사람의 뇌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픽션을 통해 긍정적이거나 부정적인 감정을 공유한다. 영화관 속의 우리는 비슷한 부분에서 웃고 운다. 이는 뇌의 작용이며, 실제로 신체적 반응이 오지 않는다 하더라도 뇌의 비슷한 부분이 반응한다. 같은 픽션을 통해 같은 감정을 오랫동안 느껴오며 사회를 꾸려왔기에 인간의 마음에는 비슷한 사회적 규율이 입력됐다. 가령 사람을 죽이는 것은 나쁘다, 라는 것이라든지.


또 인간은 자신의 기억을 왜곡해, 스스로 유의미한 존재로 만들기 때문에 살아갈 수 있다. 우리가 팩트만을 추구하는 존재였다면 죽었을 거라고 말하는 학자도 있다. 인간사에서 팩트란 존재했다, 죽는다, 이 두 가지뿐일 지도 모른다. 사실 우리가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하는 것은 어떤 의미들, 우리가 믿는 신념들인데, 그것은 팩트가 아니라 이야기다. 우리가 왜 존재해야 하고 무엇을 좇아야 하는지 등에 대한 이정표는 무미건조한 사실이 아닌 이야기에서 나온다. 게다가 우리의 뇌는 질서 정연한 이야기를 좋아하며 유의미한 패턴을 갈망한다. 또 끊임없이 의미를 읽어내려 한다. 인간이 '미국은 달에 착륙한 적이 없다'와 같은 음모론에 빠지고, 빵에서 예수의 얼굴을 보는 이유다.


미래처럼 과거도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다. 둘 다 마음속에서 창조한 환상이다. 미래는 우리가 살고 싶은 세상을 만들어내기 위해 머릿속에서 돌리는 확률 시뮬레이션이며, 과거는 미래와 달리 실제로 일어났지만 우리 마음속에서는 마음 시뮬레이션으로 표현된다. 기억은 실제로 일어난 사건을 정확하게 기록한 것이 아니다. 사건을 재구성한 것이며 크고 작은 세부 사항 중에서 상당수가 의심스럽다. p.206


저자는 여러 과학적인 연구와 사례를 통해 이러한 이야기의 속성, 인간과 이야기의 관계를 밝힌다. 그리고 나아가, 이야기의 미래는 롤플레잉 게임에 있다고 본다. 사회가 점차 파편화되면서 진짜 사회 속에서 소외감을 느끼는 인간들이 다시 어떤 사회의 이야기를 구축하고 역할을 맡으며 각종 어려움을 극복하는 이야기 속의 사회에서 살아가는 세상. 이것이 이야기의 미래일지도 모른다고 저자는 말한다. <레디 플레이어 원> 같은 픽션을 상상해보면 그럴듯한 이야기다.


나도 이야기는 사라지지 않는다고 본다. 인간이 이야기를 잃으면 정말 죽을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왜 사는가? 왜 오늘도 살아있어야 하는가? 왜 이 고된 인생을 살고 있어야 하는가? 고됨에도 불구하고 나는 왜 하루하루를 심지어 열심히 살고 있는가? 나는 왜 이 행동은 하고 저 행동은 하지 않는가? 이런 질문들은 스스로 인식하든, 그렇지 않든 간에 인간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며 어떤 행동과 결정, 감정을 추동한다. 답을 찾기 위해서라도 혹은 답을 잊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거나 허구의 인물의 이야기를 찾아 나서거나 나의 이야기를 짚어본다. 우리는 의미를 잃으면 의미를 찾기 위해 노력하거나 방황하거나 한탄한다. 그게 돈이든 가치이든 사람이든 자식이든.


우리는 이야기를 좇는 동물 즉 '스토리텔링 애니멀'이라는 속성 때문에 이야기의 제국을 세웠으며, 그것은 형태만 달리할 뿐 영원할 것이다. 출간된 지 꽤 지나고 읽게 되긴 했지만 <스토리텔링 애니멀>은 두고두고 여러 번 읽고 싶은 책이었다. 좋은 책 만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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