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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ee Nov 21. 2018

여우비같은 장례식

뭐라도 쓰기 20일차

삶과 죽음이 직접 만나는 시간은 맑은 날 내리는 비처럼 언제나 어리둥절하다. 죽은 사람 때문에 산 사람들이 모이고, 산 사람들은 살아서 먹고 웃고 조의를 표한다. 병원 옆 건물 안에 1호실 2호실 3호실 뚫려 있는 방이 각각 다른 죽은 자를 기리는 산 사람들의 자리다. 비슷한 화환을 받고 비슷한 옷을 입고 비슷한 음식을 내오며 죽은 자를 애도하고 산 자를 위로한다. 어차피 다 죽음으로 연결 된 삶인데, 시치미를 떼고 살고 있어서 그런 게 아닌가 한다. 장례식에 갈 때마다 그런 생각이 든다. 삶과 죽음은 그 결과는 너무 다르지만 본질은 너무 똑같아서 두 가지가 떨어져 있다고 보기엔 이상한 단어다. 살아 있으니까 죽는다. 우리는 그것을 극구 모른 척 아닌 척 살다가 누군가의 죽음을 만나고 날 때만 그 진실을 꺼내어보고 상처와 충격을 받는다.


알던 사람의 죽음 만큼이나 한 번도 본 적 없는 사람의 장례식도 슬프기는 마찬가지다. 내가 아는 사람이 사랑했거나 미워했거나 둘 다였거나, 다른 데서 가져보지 못한 강한 감정을 가졌을 사람의 얼굴을 죽고 나서야 사진으로 마주하는 장례식에 다녀왔다. 무슨 표정을 지어야 할지 어떤 행동을 해야 할지 몇 번을 그런 장례식에 가도 익숙하지가 않지만 어딘지 어른처럼 태연하게 인사를 하고 조의를 표하게 된다. 웃기도 하고 먹기도 하고 출근 걱정을 하다가 상주 걱정도 한다. 딱히 특별히 할 수 있는 말도 없으면서 괜히 이상한 진심을 꾹꾹 눌러 담아 무슨 말을 하게 된다. 무엇보다 살아 있는 사람이 건강하게 이별하기를 빌게 된다.


88년도에 대학에 입학한 선배의 어머니의 장례식에 다녀왔다. 나보다 약 17년을 더 많이 산 어른이라고 해도 부모의 죽음은 너무 깊은 슬픔일 것이다. 작년에 넘어지는 바람에 고관절을 다쳤던 것부터 죽음이 시작되었던 것 같다고 태연한 듯 말했지만 마음은 전혀 태연하지 않다는 걸 알고 있었다. 우리 아빠의 고관절도 새삼 걱정됐다. 선배도 나도 또 죽음으로 향하는 삶을 죽음을 잊은 채로 살아가겠지만.


한참 글을 쓰고 있는데 올해 초 아버지를 잃은 친구가 아버지의 산재 신청 때문에 겸사겸사 고향에 간다고 문자가 왔다. 잘되면 좋겠다. 다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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