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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ee Nov 24. 2018

통신 재난 디스토피아의 예고편

뭐라도 쓰기 23일

오전부터 갑자기 강제 디지털 디톡스를 당했다. 나의 주요 활동지역이 다 멈춰버렸다. 홍대입구역에서는 공중전화에 사람들이 줄을 늘어서 있었다. 김국진이 핸드폰을 광고하던 시절 같은 광경이었다. kt 아현 지국 지하에 불이 나면서 약 4개구의 통신이 멈췄다. 주말의 나는 주로 마포구 서대문구 용산구를 왔다갔다 하며 좀처럼 그 안을 벗어나질 않는데, 전부 다 해당지역이었다.


스마트폰을 사용할 수 없게 되자 길 위에서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었다. 글을 읽을 수도 동영상을 볼 수도 없었고 남자친구와 카톡을 할 수도 없었다. 음악도 전부 스트리밍으로 듣다보니 귀도 막혔다. 음 어쩐지 보라카이 화이트비치를 어슬렁거리던 때마냥 조용한 것 같은 강제 디지털 디톡스 상태가 딱히 싫지는 않았지만 조금 어색했다.


일찍이 이 사고를 알게 된 남자친구는 다행히 내가 아침에 잠깐 4개구를 벗어나 있는 동안 나에게 이 일에 대해 카톡을 남겨뒀다. 그는 서교동에서 동교동으로 인터넷을 찾아 헤매다가 광화문까지 이동하고나서야 사태의 심각성을 알아챘다. 약속 장소를 홍대에서 광화문으로 바꾸고 우리는 다시 연락이 끊겼다. 나는 인터넷이 될 때 얼른 약속 장소의 지도를 캡처해두었다.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공상을 좋아하는 내 머릿속에 재난 영화 시나리오가 스쳐지나 갔다. 통신 테러. 서울 4개구를 점령한 테러리스트 혹은 외계인 무리. 바깥으로 소식이 전해지지 않는 가운데 서울 4개구에는 무시무시한 일이 일어나는데...!! 생화학 무기 살포, 바이러스 테러, 폭탄 테러...? 올 겨울 무시무시한 재난이 온다! 과연 그들의 운명은??


이런 생각을 하다 보니, 80년 광주까지 생각이 미처서 괜히 더 추웠다. 그때 그 광주는 얼마나 고독했을까? 세상은 더 나아지긴 한 걸까?


어쩌면 실제로 정말로 나쁜 일이 닥치기 전에 통신 체계를 보완할 필요성을 느끼게 되어서 다행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대형 재난 사태에서 실패를 거듭해왔으며, 한번 문제시되었던 것조차 여론의 관심에서 멀어지면 흐지부지 되기로도 유명한 게 또 대한민국이다보니 이 일이 지나가도 달라지는 게 없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정말 끔찍할 거란 생각이 들었다.


여러 가지 생각을 하며 광화문 사거리를 지나는 길에 한 무리의 목소리 큰 어른들을 만났다. 길에서 시비가 붙어서는 어떤 여성에게 쌍시옷이 들어간 욕을 퍼붓고 있었고 경찰이 그걸 말리고 있었다. 빨갱이, 김정은 같은 단어가 들렸고 “놀러가서 물에 빠져 죽은 걸 어쩌라고” 라는 말도 들렸다. 내 가방에 달린 노란 리본이 서글프게 대롱대롱거렸다. 잰 걸음으로 그 자리를 피했다.


통신 재난을 뚫고 만난 블록체인 개발자인 남자친구와는 블록체인에 대해 이야기할 수밖에 없었다. 역시 탈중앙화야. 질 나쁜 스캠들과 코인 거품, 흉흉한 소문으로 파리 날리고 있던 블록체인 업계였는데, 오늘 세상이 블록체인을 원하고 있어! 라며 이 중앙집권적이면서 허술한 시스템이 빚어낸 오늘의 사태를 안타까워했다.


산책하다 구경한 테슬라도 문제 덩어리처럼 느껴졌다. 종로 타워에서 가만히 충전중인 미래형 자동차의 까만 창문 안으로 얼핏 보이는 큰 태블릿에 눈을 반짝이면서도 자율주행자동차는 과연 오늘의 이 상황에 대해 어떤 대비를 하고 있는 걸까, 눈앞에 보이는 미래가 걱정이 됐다. 오늘 우리의 통신 재난 데이트의 교훈들. 집에 가면 인터넷이 되지 않을 수 있으밖에서 나는 30일 프로젝트 작업을, 그는 그만의 개인 프로젝트를 하고 흩어지는 강제 자기계발 데이트까지 했다.


우리는 과연 나아지고 있을까? 오늘은 한 통신사뿐이었지만 만약 모든 통신사에 문제가 생긴다면?


적어도 아주 작은 시도에 그치고 말지라도, 우리가 그리고 인류가 나아질 기회와 방법을 놓치지 않으면 좋겠다. 그리고 이젠 연결되지 않은 시절의 생활 방식을 상상할 수 없게 되었음을, 똑똑히 알아버렸다.


오늘의 디스토피아 예고편이 본편으로 이어지지 않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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