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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ee Nov 26. 2018

기억의 아스트랄한 속성

뭐라도 쓰기 25일차

죽음 같은 겨울에서 헤어나오지 못한 누런 풀이 곳곳에 누워 있던 봄이었다. 아니 어쩌면 가을이었는지도 모른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가을 같기도 하면서도, 봄이라고 확신하는 기억의 일이다. 10살의 나는 친구들과 숨바꼭질을 하기 위해 동산에 올랐다. 무엇이 힘들고 무엇이 힘들지 않은지 아직 분간하지 못하는 기운 넘치는 철부지라, 펄쩍펄쩍 뛰어다니는 수밖에 없었다. 한달음에 산에 올랐다. 낮고 얕은 산이지만 산은 산이었다. 숨이 턱끝까지 차올랐다. 오른발이 먼저인지 왼발이 먼저인지 모른 채로 앞으로 달렸다. 이대로 달리면 오른발인지 왼발인지 모를 한 발이 저 앞에 있는 누런 풀을 밟게 될 참이었다. 


그때, 갑자기 나는 멈춰섰다. 찰나에 무언가 눈에 들어왔고, 스위치 꺼진 로봇처럼 단숨에 동작이 멈췄다. 나는 봤다. 누런 풀 사이로 검은 점들이 움직였다. 아니 확신할 수는 없었지만 누런 풀의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검은 점이 약간 움직였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절반은 확신했다. 뱀이다. 누런 풀 색이랑 똑같은 몸통에 검은 줄무늬가 있는 얇은 뱀이다. 확실히 봤다고 할 수는 없지만 확실히 믿었다. 달려오는 친구들을 멈춰세웠다. 친구들도 뭔가 심상치 않은 기운을 느끼고는 10살의 진지함 만큼이나 침착해졌다. 뱀이 있는 것 같아. 돌아가자. 


우리는 외양간에 숨어든 고양이처럼 조용히 산을 내려왔다. 확신은 증명되지 않았다. 누런 풀은 그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검은 점도 그자리에 그대로 있었던 것 같다. 아니 처음부터 없었을지도 모른다. 우리의 모험은 허망하지만 무사히 끝났다. 그리고 정말로 뱀을 본 건지, 정말 뱀이었다면 그것은 무슨 뱀이었는지, 뱀이 아니었다면 왜 검은 점을 봤다고 확신했고, 명령 받은 컴퓨터처럼 멈춰섰는지, 봄이었는지 가을이었는지, 숨바꼭질에서 누가 이겼는지 영원히 알 수 없게 되었다. 단지 위험을 느꼈고, 그 느낌에서 벗어났다는 감각이 존재했었다는 점만 확신할 수 있으며, 본 적도 없는 누런 뱀에 대한 기억만 강렬하게 남았다. 


나는 이 기억이 진짜인지 아닌지 모른다. 하지만 오래 전부터 내 기억 속에 있다. 그리고 나는 그게 뱀이 맞다고 생각한다. 거의 확신하지만 확실하지는 않다. 과거의 기억이란 얼마나 부실한 것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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