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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근 Sep 13. 2024

여덟 번째 생각 정리

감정의 절제는 스스로를 좀먹을 뿐

 언제부터 감정을 절제하기 시작한 건지 잘 모르겠다. 언제부터였을까. 감정을 드러낸다는 것이 하나의 수치로 느껴지기 시작했다. 내가 화를 냈을 때, 내가 짜증을 냈을 때, 내가 울 때, 이 모든 상황들이 하나의 수치가 되었다. 전혀 수치스러운 행동이 아닌데, 나는 그것들을 수치로 느끼고 있다.

 
 옛날에는 잘 울곤 했다. 화가 나면 울음도 같이 나고 그랬다. 그래서 정말 화가 나는 상황에는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화를 내지도 않고, 울지도 않게 되었다. 그냥 웃고 있다. 언제부터인가 나는 그냥 웃기만 했다. 그게 나를 대표하는 것인 거 마냥 어떤 말을 들어도 웃기만 했다.
 
 이러기 시작한 후로 새로운 사람들을 사귀는 것도 어려워졌다. 얼마 전에 20년 이상을 알고 지낸 친구에게 들었던 말인데, 자기는 내가 정말 친하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고 했다. 그저 공기 같은 느낌으로, 지구를 공전하는 달 같은 그런 존재처럼 느껴진다고 했다. 나는 늘 사람들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한다는 말이었다. 그 정도는 사실 나도 어느 정도 인지는 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친구조차도 내가 거리를 둔다고 여길 줄은 몰랐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그렇게 상처가 되지는 않았다. 아마 정말로 그 친구 말대로 나는 거리를 두고 있던 게 아닐까 싶다.
 



 사람들과 친하게 지내고 싶으면서도, 친하게 지내고 싶지 않은 감정을 느끼곤 한다. 정말 바보 같게도 처음 본 사람에게서 내적친밀감을 느껴서 다가갔다가, 그 사람이 멀어지면 상처받고, 그 사람이 다가오면 부담스러워한다. 정말 바보 같다.




 도대체 언제부터 이랬을까. 학창 시절에는 이러지 않았는데, 성인이 되고 나서부터 이랬던 거 같다. 아무래도 재수기간의 영향이 크기도 했을 것이다. 당시에는 급에도 맞지 않는 대학에 가겠다고 아등바등 스트레스를 받아왔으니 말이다. 인서울 대학에 가 야한 다와 실패하면 안 된다는 그 생각이 나를 사로잡았고, 재수 학원에서는 친구조차 만들지 않았다. 아무래도 이때가 기점이었던 거 같다. 사람이 반쯤 미쳐있었다.


 재수기간 혼자 있을 때는 종종 울었다. 나는 스스로가 감정이 풍부한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했고, 그동안 눈물을 흘린 적이 거의 없었다. 그런데 너무 힘이 드니 그런 사람 같은 건 없다고 느낄 정도로 자연스레 눈물이 나왔다. 내가 왜 이렇게까지 스트레스를 받으며 공부를 해야 하는가. 내가 원하는 건 이런 공부가 아닌데. 그림도 그리고 싶고 프로그래밍도 하고 싶지만 이 둘을 하려면 대학에 가야 한다는 것이 스트레스였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부터 재수학원 친구들과 말도 안 하고 혼자 지냈다. 내 감정을 보이고 싶지 않았고, 내 감정들을 이야기하는 것이 공부에 방해가 됐기 때문이다.


 그 당시 9월 모의고사를 보고 더 좌절했다. 현역 때보다 더 점수가 안 나왔기 때문이다. 과도한 스트레스가 그 원인이었을 것이다. 절망에 빠져 혼자 앓다가 나는 이때 처음 용기를 냈다. 내가 원하는 공부는 이게 아니다. 대학에 가지 않고 만화를 배우거나 기술을 배우겠다고 처음 용기 내어 부모님께 말했고, 집은 금세 눈물바다가 되었다. 나는 이 의견을 내는 것이 너무나도 힘들었다. 이렇게 될 걸 뻔히 알고 있었다. 그래서 더 말하기가 싫었다. 하지만 내가 죽을 거 같은걸. 말하지 않으면 내가 죽을 거 같아 이야기했다.


 9월까지 온 이상 2개월만 참기로 했다. 수능까지는 보고 그 뒤를 알아보자고. 이미 이 시점에 나는 인간관계고 정신이고 다 무너져 있었다. 핸드폰은 정지되어 연락하는 친구들은 한 명도 없고, 한없이 낮아져 버린 자존감과 미래에 대한 우울 불안, 하지만 2개월 뒤에는 모든 게 풀릴 거라고 생각하고 2개월을 참았다. 그리고 감정도 같이 참아버렸다. 내가 힘들어하는 게 가족에게 전이되기에 나는 내 감정 표출이 죄라고 생각했다.


 다행히도 수능은 잘 봤고, 해피엔딩이었다. 하지만 그 1년 동안 감정이 망가져버렸다. 그리고 잘못된 교훈도 얻었다. 내가 감정 표현을 안 해야 모두가 행복하구나. 내가 아무렇지 않게 있어야 모두가 편하구나.




 대학에 들어와서 몇 년간은 적응을 못했다. 아는 사람도 두 명 밖에 없고, 그마저도 군대에 가서 아는 사람이 없어졌다. 혼자 수업 듣고 혼자 밥을 먹는 게 일상이 됐다. 동아리에도 들어가 봤지만 금방 도망쳐 나왔다. 나와 친해지려고 다가오는 사람들을 받을 수 없었다.


 그래도 사람이 바뀌려면 행동을 해야 한다고 생각해 얼굴에 철판을 깔고 동아리를 전전했다. 그러니 아는 사람들은 많이 생기고 사람 만나는 것에 대해 학습했다. 일정 거리를 좁히는 법에 대해서도 터득했다. 하지만 그 이상 줄일 수 없었다. 공전하는 법을 배워버렸다. 이 대로 지금까지 살아와버렸다. 바뀌어야 하지만 너무나도 힘들다. 어쩌면 지금의 나도 괜찮은 게 아닐까 하고 생각하지만 나 스스로 사람들과 더 친해지고 싶어 하는 것도 알기에 오늘도 혼란스러움을 유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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