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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창범 Sep 20. 2023

1. 스피커가 말하면 안 돼?

MZ사회생활기록부 > 예비창업자 노윤재 편 (1)

H대학교 창업지원센터 '재학생의 창업 독려를 위한 사례집' 중      


스물일곱, 저는 사업가입니다. 


너무 거창했나요? 그냥 평범한 20대 후반 남자, 전공은 경영학입니다. 사례집이니 수기 형태로 제가 사업을 시작한 제 이야기를 풀어보겠습니다. 제가 이런 공식적인 자료에 올라도 괜찮을지 모르겠지만요.


졸업하는 해 '설마, 될까?'하고 지원했던 한 잡지사의 기자 아카데미에 덜컥 합격해 버렸습니다. 도서관에서 종종 보던 잡지였어요. 제게 숨겨진 재능이 있었던 건지, 아니면 뭐 경쟁률이 낮았을 수도 있죠. 그래도 아카데미에서 '인맥', '경험', '포트폴리오'를 만들면 취업에 도움이 될 수 있을 거라 생각했어요. 마지막 학기와 병행할 수도 있었구요.


그런데... 술 잘 먹고, 아카데미 친구들 잘 챙기고, 무거운 상자들도 거뜬히 잘 나른다는 이유로 인턴기자까지 돼버렸습니다. 게다가, 전 정사원을 꿈꾸게 되었습니다. 그곳에서 일을 해보니 콘텐츠를 만든다는 게 저와 잘 맞는다는 걸 깨닫게 됐거든요.

      

하지만 거기까지였어요. 제가 근무한 곳은 (어느 잡지사나 그렇겠지만) 종이 잡지 판매와 광고, 간간이 내는 단행본 외에는 마땅한 수익모델을 찾지 못해 살림이 넉넉지 못했거든요. 하지만 인턴 계약이 끝나가는 마지막까지 확실한 얘기가 없었습니다. 저도 일말의 희망을 품고 굳이 묻진 않았죠. 그리고 어느 날, 저는 새로운 직장을 알아볼 새도 없이 백수가 되어 있었습니다.      


윤재는 여기서 키보드를 분주히 오가던 손가락들이 멈췄다. 그리고 책상 한 편에 쌓여있는 몇 권의 잡지를 향해 애증 어린 시선을 보냈다. 맨 밑에 깔린 작년 10월호에는 자신이 처음 취재한 기사가 있었다. 한국에 남은 마지막 자전거 공장에 대한 기사였다. 윤재는 한숨을 쉰 뒤 다시 글을 써 내려갔다.  



몇 달간 ‘무직’으로 지냈습니다. 공기업 준비도 하고 대기업 공채도 노려봤지만 글쎄요... 제가 부족한 탓이겠죠? 어깨까지 오는 노란 머리와 귀에 걸린 작은 물고기 귀걸이 같은, 외모 때문만은 아니었을 거예요. 



그... 그렇겠죠? 어쨌든 번번이 낙방을 했어요. 그러던 중 채용 공고가 떴다는 콘텐츠진흥원 홈페이지에 들어갔다가 정부지원사업 공고 하나를 발견했어요. 바로 ‘지역 특화 콘텐츠 개발지원 사업' 공고였습니다. 저같이 아직 사업자를 내지 못한 소위 '예비창업자'도 지원이 가능했어요.      


공고에 나온 사업 목적은 이랬어요.     


‘문화인류학에 기반한 ‘역사 문화 자원, 지역 민간 설화, 혹은 지역에 특화된 스토리텔링 발굴 및 가공을 통해 지역 관광과 경제에 부가가치를 창출할 수 있는 콘텐츠 개발 및 관련 산업 활성화 도모’     


이 어려운 단어들로 적힌 공모의 정체를 힘겹게 해석해 낸 후 전 심장이 발딱발딱 뛰는 걸 느꼈습니다. 제가 어렴풋이 ‘사업을 한다면 이런 거 어떨까?’ 생각했던 아이템과 딱 맞아떨어졌거든요. 아마 글을 읽는 재학생 여러분도 학교와 사회새활의 경계에서 이런 핏이 딱 맞는 순간이 있을 거예요. 그러려면 하고 싶은 게 무엇인지를 아는 게 중요... 


윤재는 마지막 문장들을 쓱쓱 지워버렸다. 사실 자신이 가진 건 열망이 아닌 호기심, 관심 정도였는데 궁지에 몰린 상황이 하드캐리한 것이지 않나! 



전 한 달 동안 열심히 사업계획서를 작성했습니다.      


인터넷과 관련 서적을 통해 얻은 사업계획서 문법과 용어들은... 흑각설탕처럼 딱딱했습니다.

하지만 '너를 지원할지도 모르는 정부가 이렇게 말하면 너도 같은 방식으로 답을 해야 한다'는 건 원칙이었습니다. 


그냥 부담 없이 제 아이템을 생각나는 대로 풀어쓰면 이렇습니다.


제목 : 훈풍이 나그네의 옷을 벗기듯, 스피커의 스토리는 아이팟을 떨군다네.


제가 사는 동네에는 큰 호수가 있습니다. 원래 강의 일부였다는데 도시계획에 방해가 된다고 딱 막아버렸더니 호수가 됐대요. 호수는 뫼비우스의 띠 모양이에요.  L사에서 운영하는 놀이공원을 중심으로 좌우로 대칭을 이루고 있어요. 



오래전 대학 진학을 위해 지방에서 서울로 상경하신 아버지는 이곳에 처음 전셋집을 얻으셨대요. 그때 이 호수는 가로등도 별로 없고 수풀이 우거진 소위 '우범지대'였대요. 덕분에 아버지는 방학 때마다 동네서 ‘방범 보조’라는 알바를 구할 수 있었대요. 부족한 경찰 인력 대신해 짝지어 호수를 순찰하는 일이었지요. 그땐 밀려드는 사건 사고 신고에 정신이 없었대요. 그래도 시급은 꽤 높았다고 해요. 


90년 대 말, 걷기 열풍이 전국을 휩쓸었습니다. 운동부족으로 인해 성인병 발병률이 높아지자 정부에서는 사회적 의료비 지출을 줄이기 위해 대대적인 걷기 캠페인을 연 거죠. 성인병에 대한 공포를 부각한 캠페인 콘셉트에 국민들의 호응이 꽤 열렬했답니다. 특히 도시인들은 굳이 따로 시간을 내어 걷기 시작했어요. 그러다 보니 이곳저곳에 가로등이 늘어났습니다. 덕분에 이 호수도 '안전한 곳'을 넘어서 무려 도심 속 인기 관광지가 됐어요. 호수 한가운데 있는 놀이 공원, 그리고 호수 주위를 둘러싼 벚나무 덕분이었죠. 그리고 운동을 나온 지역 주민들에 놀러 온 사람들까지 합류해 북적이며 봄의 벚꽃 호우, 높은 놀이기구에서 본 도시의 야경이라든지, 호숫가에서의 첫 키스 같은 '이야기'가 대량 생산되는 곳이 됐습니다.     


저도 저녁에 시간이 날 때마다 운동 삼아 호수를 몇 바퀴씩 돌곤 했습니다. 그런데 공원 곳곳의 스피커에 자꾸 시선이 갔습니다. 스피커에선 몇 안 되는 클래식 곡들이 무한반복되는데 쓰임새가 좀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렇게 듣는 사람들이 많은데 말이에요. 


그런데 어느 날, 스피커를 통해 처음 사람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어요. 

     

“OO동 XX님이 강아지를 찾고 계신답니다. 정말 사랑하는 시츄 강아지라고 하시네요. 머리에 빨간 리본이 있구요. 찾아주시면 사례를 해주신대요." 

(소곤소곤 : 얼마라구요? 100만 원? 정말? 일단 말하고 나면 나중에 못 바꾸는 거 알죠?)

"흠흠. 여러분! 사례금이 무려 100만 원이랍니다. 목격하신 분은 010-XXXX-XXXX로 꼭 연락 주시랍니다.”   

  

호수를 걷던 사람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어요. 이어폰을 끼고 호수를 뛰던 사람들도 어떻게 들었는지 이어폰을 귀에서 빼고 자리에 딱 멈춰 섰죠.     


"백만 원!"

"어머! 백만 원이래."

"대박!"

"백만 원짜리 시츄."

"전화번호 뭐라고? 적었어?"



헐! 제가 생각하던 모습이 눈앞에 펼쳐진 거죠. 제 상상력은 요동치기 시작했습니다. 


'스피커를 이용해 방송을 해보면 어떨까? 동네 사람들 사연받아서 읽어주고 출연도 시키고, 광고로 수익도 내고. 그렇게 이야기를 모으다 보면 나중에 뭔가 쓸모도 생기지 않을까?'

    

이때의 경험과 생각에 살을 붙이고 정부식 문법으로 정리하니 뚝딱, 사업계획서가 됐어요.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제목 : 지금, 내가 사는 지역의 스토리를 발굴 및 순환시키는 지역 기반 미디어 사업 '동네를 말하는 스피커, 동. 말. 스.' 


 # 스피커가 설치된 산책로, 공원은 전국에 5,000여 개가 있음. 

 # 스피커라는 미디어를 통해 '쌍방향 커뮤니케이션'이 가능한 지역 거점 방송 운영

 # 이를 통해 해당 지역에 거주하는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수집하고 공유함으로써 스토리텔링의 순환효과 기대. 또한 누적된 스토리는 지역의 브랜드 아이덴티티를 강화하는 미디어 소재, 콘텐츠로 활용해 지원사업의 취지에 부응할 거라 판단됨.

 # 수익모델은 미디어를 통한 지역 광고를 주 수입원으로 하며, 수집된 스토리의 2차 사용권을 통한 추가 수익모델 수립 예정.

 # 사업기간 동안 1개 공원에서 주 3일, 하루 1시간씩 운영해 사업의 타당성을 확인하고 비즈니스 모델을 완성할 예정.   


뭐 여하튼 이렇게 무려 정부지원금으로 시작하게 됐어요.    

많이 부담되기도 해요. 내가 생각했던 대로 진행될 수 있을까? (후아!)


얼마 전 OT에 참석해 그래도 좀 현실감을 갖게 되었습니다. 사업의 취지대로 지역 스토리와 관련된 일을 하는 다양한 분들이 모였어요. 사실, 프로들 앞에서 좀 주눅이 들기도 했지요.


그리고 담당자인 민주임님을 만났습니다. 제가 생각한 ‘전형적인 공무원 상’과는 좀 다른 느낌이었습니다. 무지 적극적이고 사람을 상대하는데 능숙한 분이었죠.     


"노윤재 님이죠? 사업계획서 잘 봤어요. 예비창업자고 아직 법인은 안 냈죠? 잘 진행하면서 법인 내시구요. 꼭 성공하시길 바랍니다. S동 호수공원에서 진행하죠? 그쪽 구청에 협조공문을 보내서 허락을 받아놨으니 담당자분에게 연락 후 방문하세요. 관련 내용은 메일로 보내 드릴게요."


자 이제 본격적인 시작입니다!

이 글을 보시는 분도 L놀이공원에 오시는 분들은 호수공원에 들러 방송 들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여기까지 적은 윤재는 저장 버튼을 눌렀다. 일어나 창 앞에 서니 멀리 호수공원이 보인다. 요즘 참 정신없는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 하지만 가만히 있으면 불안감이 덩치를 키운다. 사람을 만나고 현장에 가면 설렘이 불안을 누른다. 그래서 바빠야 한다. 내일은 학교 동아리에 들르기로 했다. 뭐가 됐든 나중에 그들의 손을 빌릴 일이 있을 것이다.






윤재는 다음날 학교 동아리에 찾았다. 그가 속한 미술동아리에 작은 행사가 있는 날이었다. 아직 사업에 대해선 알라지 않았다. 그래서 동아리 사람들 사이에서 그는 아직 '인턴을 하다 정사원이 되지 못해 다시 취업을 준비하는 백수'였다. 


행사에 이어 술자리가 벌어졌다. 참석한 선배나 동기들 대부분이 대기업이나 금융권에 근무한다. (그렇지 못한 이들은 오지 않았다.) 투자와 새 차를 화두로 올리는 그들 사이에서 윤재는 할 말을 잃어갔다. 아무래도 백수 시절 한 층 한 층 쌓여온 열등감이 여전히 마음 밑바닥에 있는 것 같았다.


잠시 담배 한 대를 피고 들어와 술집 안을 쓱 둘러봤다. 부슬부슬 비가 오는 날이라 그런지 만석이었다. 그리고 테이블마다 경쟁하듯 언성이 높았다. 윤재는 가만히 귀를 기울여 봤다.


교양을 같이 듣는 타 과 학생과의 썸, 바닥 친 성적에 대한 걱정, 대만에 여행을 가서 맛본 다양한 먹거리 예찬, 사랑, 인생, 멋, 씁쓸함... 


이야기 속 단어들이 화자의 입을 떠나 술집 공간 위로 자막처럼 흐르고 있었다. 잡지사에서 어설픈 만큼 더 집중했던 교정시간이 이랬다. 오랜 시간 원고를 뚫어지게 보다 보면 쉬는 시간에 창밖으로 단어들이 떠다니고 있었다. 


‘그래 뭐 내가 할 일이 이런 거지. 이야기들을 수집하고, 편집하고, 들려주는 것. 그냥 두면 날아가 버릴, 가치 있는 이야기들이 세상에 남겨질 수 있도록 하는 것. 일단 잘해보자. 이 길도 쉽게 들어선 건 아니잖아? 어쩌면 내게 소명일 수도?’     




FAQ


윤재 : (정부지원사업 공지를 본 뒤) 저... 제가 아직 사업자가 아닌데 정부지원사업 지원이 가능할까요?


지원사업 담당자 : 가능합니다! 법인을 내지 않은 이들을 '예비창업자'라 하는데 좋은 사업 아이템을 가진 예비창업자가 이를 실현시킬 있도록 지원하는 지원사업들이 존재합니다. 이런 사업의 경우 지원금과 함께 업교육, 멘토링 지원 등, 단계에서 필요한 추가적 지원이 함께 된답니다. 단, 이런 지원사업이 존재하는 이유는 이들이 이 사업통해 정식 사업자가 되는 목표로 하기 때문에 '의무 역할'에는 이런 조항이 존재해요.


선정자는 선정된 창업아이템 관련 업종으로 협약종료일 2개 월이 전에 중소기업창업 지원법 상의 창업(사업자 등록)을 이행하여야 함(미충족 시 사업지원 중단 및 기집행한 사업화 자금 환수 조치 예정)


제가 봐도 좀 엄한데, 뭐 하시면 되겠죠? 하하하~


** 이 글에 등장하는 지원사업은 가상의 사업으로 이렇게 구체적인 목표를 가진 지원사업의 경우, 예비창업자가 지원하기는 힘들다.





다음 화 예고 

    

송할머니는 아나고 구이와 소주 한 병을 준비해 놓고 계셨다. 긴장이 풀어져서인지 아나고를 굽는 냄새와 소주 한 잔, 열어 놓은 문으로 들어온 미지근한 바람 한 줄기에 마음이 몽글몽글해졌다.


자리에 앉아 방송에 대한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는데 송할머니가 앞치마 주머니에서 봉투 하나를 꺼내 윤재에게 건네주셨다. 


"이, 이게 뭐예요?"



-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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