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의 키워드] 하나. #이직

'태양계'와 '소우주' 이야기

by 노창범

* 이직(移職) : 직장을 옮기거나 직업을 바꿈


"축하드려요!"


K원장은 소주를 따르며 먼저 축하 인사를 건넨다.

그녀는 해외 한의학 교육을 담당하는 팀의 팀장이다.


"축하라는 말은 좀... 하하,"


항상 떠나는 이들에게는 첫 잔을 채우며 축하 인사를 하곤 했다.

B는 막상 자기 일이 되니 좀 민망했다.


K원장이 삼겹살을 굽기 시작한다.

지금은 저녁 7시, 코로나19로 영업시간은 9시까지, 두 시간의 짧은 술자리.


"전무님한테 인사는 하셨죠?"

"예, 환송회를 두 번이나 해주셨어요. 5인 이상 집합 금지라 팀을 둘로 쪼갰죠. 그렇데... 좀 의아했어요. 전무님, 이미 알고 계신 듯했어요. 난 말 한 적 없는데. 그럴 것 같았다고."


"아, 제가 얘기했어요."

"예?"

"전에 주말근무하다 잠깐 얘기 나눌 때 팀장님이 얘기했잖아요. 새로운 일 하고 싶다고. 얼마 전 전무님과 면담하는데 팀장님 얘기도 좀 했거든요. 결과적으론 정말 그렇게 됐네요?"


"... "


'어떻게 그걸 말할 수 있지? 뭐 덕분에 수월하게 나가는구나.'

B는 그냥 긍정적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B는 한방병원에서 마케팅 팀장으로 근무했고, K원장은 몇 달간 그의 옆자리에서 일했다. 이웃이라지만 얘기를 나눌 기회는 별로 없었다. 둘 다 매우 바빴고 업무 얘기 외에는 거의 하지 않는 편이었다.

그녀는 자주, B도 종종 주말 출근을 했는데 그럴 때도 식사 한 번 하지 않고 일만 하다 퇴근하곤 했다. 아, 가방을 싸놓고 10분 정도는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곤 했다.

'그때였구나.'

얼마 뒤 그녀는 아래층으로 내려갔고, B가 퇴사한다는 얘기가 돌자 그녀는 저녁을 한 번 먹자고 했다. 그런 자리였다.


"그런데 왜 그만두세요?"

"아, 그게 좀 복잡한데. 음... 이 노래 한 번 들어볼래요?"


B는 핸드폰으로 노래 한 곡을 틀었다.

몇 분 동안 그녀는 이런 가사를 듣고 있었을 것이다.


<태양계>

나의 사랑이 멀어지네
나의 어제는 사라지네
태양을 따라 도는
저 별들처럼 난
돌고 돌고 돌고
그대를 향한 나의 이 어리석음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머물지 못하는
내 두 눈에 고인
눈물이 흐르네


나의 사랑은 떠나갔네
나의 어제는 사라졌네
지구를 따라 도는
저 달 속에 비친
너의 얼굴 얼굴
그 얼굴 위로 흐르던 너의 미소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머물지 못하는
내 눈에 고인
눈물이 흐르네


노래가 끝났는지 그녀는 이어폰을 돌려준다. 의아한 표정 장난스러운 표정, 다시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팀장님, 설마 실연?"


"에이~ 아니에요. 혹시 <싱어게인>이라는 프로그램 보세요? 무명가수, 혹은 잊힌 가수들 나와서 하는 경연 프로그램이요."


"아뇨. 바빠서 TV는 거의 못 봐요."


"경연에 나온 다린이라는 가수가 이 노래를 불렀어요. 원래 성시경 노래구요."


"그래서요?"


"이 노래를 듣고 생각에 생각이 꼬리를 물더라구요. 아, 난 행성이고 노래처럼 돌고 돌고 돌고... 회사를, 상사를 태양 삼아서요."


이 말에 뭔가 반응을 하기에는 쉽지 않을 것이다.

구심점이 강하다는 건 그만큼 안정적인 직장이라는 말이니까.


"이제 도는 게 좀 지겹더라구요. 나는 항상 종속된 존재라는 게. 그래서 내가 중심이 되는 일을 해보고 싶었어요."


그리 길게 이어질 화제는 아니었는지 금세 병원에서, 또 일을 하면서 있었던 소소한 이야기들로 시간이 흘렀다.


9시에 가까워 오자 직원은 곧 나갈 시간이라는 신호를 보낸다.

K원장은 갑자기 뭔가 생각난 듯 가방을 뒤진다. 그리고 두 권의 책을 꺼낸다.

<미움받을 용기> 1, 2


"저 1권은 읽었어요."

B는 눈치 없이 얘기했다. K원장은 약간 무안한 듯, 2편만 건넨다.


"선물이에요. 전에 옆자리서 아래층으로 갈 때 <일의 기쁨과 슬픔>이란 책 주셨죠? 독후감은 꼭 제출해야 해요?"


그리고 코로나19가 지정한 신데렐라의 시간, 논현동 거리는 그들처럼 막 쏟아져 나온 사람들로 가득하다.


B와 K원장은 악수를 하고 헤어진다.

사실 내일도 출근을 하니 그렇게 마지막의 느낌이 크진 않다.


B는 어둠 속 사무실을 올려다본다.

'괜찮은 걸까? 잘 한 선택일까?'


나이가 들수록 회사는 B에게 많은 책임을 요구했다.

"그러라고 팀원들보다는 월급을 더 주는 거지!"

실제로 들었던 말이다.

감정 소모가 많지만 또 딱히 일이 새롭진 않았다.

'돌고, 돌고, 돌고'

노래처럼. 그랬다.


집에 가는 치하철에서 B는 K원장이 선물한 책을 펼친다.

작은 종이 하나가 툭 떨어진다. 손글씨 편지다.


...

한의학에서는 사람을 소우주로 간주하거든요.

그리고 사람과 사람이 만날 때, 주파수가 맞아떨어질 때

사람 안의 소우주가 열리는 게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

팀장님은 남의 주파수를 알아보고 맞춰주시고, 따뜻한 말 몇 마디로

사람의 경계, 그 너머에 있는 우주를 열어 보이시는 게 아닐까 하구요.

...





책을 들춘다. 눈에 띄는 내용.


헤어지기 위해 만난다. 최선의 이별을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라.

'아, 아쉬움이 남는 건, 이 직장에서 난 만족할 만큼 최선을 다하지는 않았던 거구나.'

B는 직장과 헤어지는 순간 깨닫는다.


B가 품은 태양계의 꿈과 K원장이 선물한 소우주의 의미.

'이미 난 소우주를 품고 있는데, 또한 타인들의 소우주를 열면서 더 큰 우주를 만들 수 있을 텐데.'


퇴사를 이틀 앞둔 B는 그런 생각을 했다.

그리고, 마스크를 고쳐 쓴 뒤 잠시 눈을 붙인다.


지하철은 덜컹거리며 가기로 정해진 길을 따라 묵묵히 달리고 있었다.




-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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