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에도 불구하고, 빛날

[그림에세이] 기분 좋은 그녀를 배우다

by 노현지


많이 가깝거나 서로 잘 알진 못하지만 보는 것만으로 기분이 좋은 사람이 있다. 몇 년 전, 회사에서 만난 그녀가 그랬다. 부서 간 업무 특성상 협조를 바탕으로 하면서도, 일을 재촉하거나 때론 R&R을 명확히 하기 위한 갈등도 발생하고, 그 와중에 서로 일을 떠 넘기기도 해야 하는 그런 오묘한 관계 속에서 만난 사이. 짜증이 날 법 한 데도 그녀는 늘 씩씩하고 밝았다. 그때의 그녀도 벌써 5년차 사원, 어떻게 그 연차에도 그런 긍정적인 태도로 회사 생활을 할 수 있는지 무척 놀라웠다.


그쯤되면 입사의 설렘도 사라지고, 반복되는 일도 지겨워지고, 불필요한 부서간 명목 싸움에 지쳐가기 마련이었다. 부서를 바꾸어 보아도 다 비슷비슷한 회사 일에 나 역시 많은 직장인들처럼 즐거움이란 ‘오늘은 어떤 맛난 점심을 먹을까’ 하는 정도, 바쁨과 불만과 걱정으로 점철된 지리한 회사 생활을 하고 있었다.



어느 날이었다. 우리 팀과 제3의 부서 사이에서 발생한 문제가 탁구공처럼 퐁당퐁당 건너 그녀에게까지 도달했다.

“어지간하면 내가 처리하고 싶은데, 우리 팀장님도 너무 완강해서 어쩔 수가 없네요.”


애꿎게 고생할 그녀에게 미안한 마음을 담아 일이 이렇게까지 건너오게 된 정황과 그녀를 괴롭힐 수 밖에 없는 내 사정을 변명했다.


“아, 그렇게 된 거군요. 아닙니다. 어려운 것도 아니네요. 저희 팀장님께 말씀 드리고 제가 바로 처리하겠습니다.”


상황을 이해한 그녀는 투정도 고민도 없이, 내가 보는 그 자리에서 바로 새 메일창을 열어 마치 피아노 건반을 두드리듯 아름답게 ‘다다다닥~’ 키보드를 치며 자신이 일을 처리하겠다는 회신 메일을 쓰기 시작했다.
다시 한번 미안하다고, 그리고 논쟁을 마무리 지어줘서 고맙다고 말하고 곧바로 자리로 돌아왔지만, 사실 그 순간 나는 머리를 무언가로 한대 세게 얻어 맞은 것 같았다.


나는 예상치 못한 일 혹은 새로운 일이 떨어지면 일에 착수하기까지 고민하고 걱정하는 데 꽤 많은 시간을 썼다. 심지어 내 일이 아닌 듯한, 억지로 떠맡은 일에는 화를 내는 시간도 필요했다. 그리고 회사에는 나같은 투덜이들이 일반적이었다. 그렇기에 걱정도 없이, 불평도 없이 쉽게 일을 수용하고, 즉시에 시작하는 그녀의 방식은 내게 가히 충격이었다. 일에 따라서는 깊이 고민하고 걱정해야 할 때도 물론 있지만, 그녀처럼 조금 가볍게 일을 대하는 것도 필요할 듯했다. 그래야 일에 압도되지 않을 수 있었다. 그러면 생활이 좀 더 밝을 수 있을지 몰랐다.
자리에 앉아 한참 동안 그녀의 시원시원한 키보드 소리를 곱씹었다. 그녀의 기분 좋은 밝음과 일을 대하는 태도를 나는 진정으로 배우고 싶었고, 후배였지만 존경했다.


그후로 일년 뒤, 그녀는 또 다른 세상을 향해 먼 땅으로 떠나기로 했다. 동료들은 응원의 롤링페이퍼를 전했고 그녀는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짧은 답장을 남겼다. 늘 밝은 모습에 덩달아 즐겁게 일할 수 있었다는 나의 감사와 찬사에 그녀가 남긴 마지막 편지가 평소와 달리 밝지만은 않아 조금 씁쓸했다.


자신을 밝게만 보는, 그리고 계속 밝기를 바라는 사람들의 기대. 가끔씩 자신을 쉬운 사람으로 대하는 못난 사람들의 무례한 언행에 타고난 자신의 성격을 속으로 고민하고 탓하기도 했다는 그녀. 무한 긍정 로봇인가 했는데, 그녀 역시 사람이었다. 그리고 우리는 주위의 밝음을 당연하게 생각하다가 빛을 잃은 것일지도 모른다.



요즘 이런 저런 걱정이 많다. 걱정을 하나하나 풀어 보면 어려울 것도 없고 복잡할 것도 없는데 나는 왜 어느 것 하나 시작하지 못하고, 그러니 절대 해결될 수 없을 일들을 끌어안고 울상인지 모르겠다.
머리 속을 맴맴 도는 생각들로 어지러울 지경에 이르렀을 때쯤, 그녀가 생각났다. 피아노 건반처럼 시원하고 아름답게 울리던 그녀의 키보드 소리. 그토록 배우고 싶던 그녀의 태도를 나는 아직도 배우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그녀의 안부가 궁금해졌다. 그녀는 지금 어디를 밝히고 있을까? 부디 그곳은 그녀의 밝음이 주위를 밝힐 가치가 있는 곳이기를. 비록 ‘돌+I 총량 보존의 법칙’이나 ‘진상 총량 보존의 법칙’ 등은 중력처럼 지구상 어디에나 적용되겠지만, 나는 믿는다. 그녀의 에너지와 밝음이 그녀를 끝내 멋진 길로 인도하리란 것을.
우연히 SNS에서 만난 사진 속 그녀가 예의 밝은 웃음을 짓고 있어 다행이다. 역시나, 보고만 있어도 기분 좋은 그녀. 나는 오늘도 그녀를 조금 배워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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