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일탈

[그림에세이] 일상의 관성을 벗어나다.

by 노현지


꽤 오래전, 날씨가 좋은 봄날이었다. 여름으로 가고 있는 날이기도 했다. 어쩌면 동풍이 부는 날이었을까? 여름이 오고 있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만큼 시원하고 청량한 바람이 구름을 하늘 높이 불어 올렸다. 청아하게 파란 하늘이 더욱 넓어진 듯했다. 그런 날은 목적지도 없이 떠나고 싶어 졌다. 괜히 멀리 사는 친구에게 문자를 보냈다.


“오늘은 집 정류장에서 내리지 않고 계속 버스를 타고 더 가보겠어.”


늘 타는 버스는 내가 사는 동네를 거쳐 여의도를 지났다.

두어 정거장 더 타고 가서 한강공원에서 내려도 좋을 것 같았고, 계속 타고 가면서 버스 차창으로 어두워지는 하늘을 보는 것도 좋을 것 같았다. 남편은 늦을 예정이었고, 집에 간다고 딱히 할 일도 없었다. 그래, 오늘은 꼭 이 환상적인 하늘을 오래오래 즐겨 보겠어.

버스가 집 근처 정류장에 가까워졌다. 가슴이 두근두근 했다. 진짜 계속 타고 갈까? 피곤한데 집에서 TV나 볼까(사실 피곤하지 않았다)? 이런 날씨가 자주 오진 않는데. 그래도 혼자서 굳이 가서 뭘 하겠다고.

'다음 내리실 정류장은 아현동 주민센터 입니다.'


곧 결전의 순간이 다가옴을 알리며 점점 조여오는 버스 안내 방송에 일상의 관성과 일탈의 욕망이 내안에서 더욱 첨예하게 대립했다.

지나 갈까? 내릴까? 갈까? 내릴까? ...... 결국, 관성 윈!

“나 그냥 집으로 가는 중.”
“왜? 날씨도 좋다면서 어디든 가보지.”
“그러게, 나는 왜 내려 버렸을까?”

늘 걷던 걸음으로부터 아무 이유 없이 벗어나는 일은,

아무 이유 없이 어려웠다.



얼마 전 오랜만에 친구들을 만나러 가기 위해 지하철을 탔다. 마침 종점역, 문이 열리고 한 줄이 그대로 비워진 지하철 의자가 반갑게 나를 맞았다.
지하철을 탈 때면 항상 먼저 찾는 자리인 끝자리를 향해 눈이 갔다. 그리고 핑크색 의자가 눈에 들어왔다.


‘아, 저곳은 비워 두어야지. 그래, 그럼 그 옆자리.’

지하철 자리뿐아니라 식당이든 카페든, 극장, 휴게실,

심지어 공원 벤치에서도 나는 늘 구석자리를 선호했다.

물론 맨끝자리가 옆사람과 공유하는 면이 한 면뿐이라서 이 자리를 선호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나는 그런 이유에 더하여, 가운데 앉을 때면 사면이 통유리로 만들어져 안이 훤히 보이는 집처럼 어쩐지 내가 만천하에 드러나는 듯 했고, 그래서 어색하고 불편했다.

지하철 문을 통과해 가장자리 방향으로 가다가 문득, 가운데 자리를 보았다.


‘어차피 제일 끝자리는 비워둬야 하는 것, 진짜 끝자리도 아닌데 그냥 가운데에 앉아 볼까?’


방향을 바꿔 가운데 자리에 앉았다. 가방에서 책을 꺼냈다. 책에 시선을 두고 있으니 내가 앉은 자리가 어디인지도 모르겠고, 아무것도 달라질 것도 없었다.

그랬다. 늘 걷던 걸음에서, 일상의 관성에서 우리는 잘 벗어나는지 못한다. 그러나 못하는 것일까, 안하는 것일까? 시작은 '안하는 것'이 아니었을까?

굳이 새로운 것을 수용해야 하는 품이 귀찮기도 하고, 불편하기도 해서 늘 같은 것만 고수하다보면 어느 순간 못하는 이유들이 한가득 쌓인다. 그리고 시간이 가면서 그것들은 아주 중요해져 버린다.
못하는 것이든 안하는 것이든 다른 길로 걸음을 옮겨도 그곳엔 책 읽는 것이 좋아 운전을 배우고 싶어하지 않는 내가, 에피톤프로젝트의 '첫사랑'을 돌려 들으며 봄앓이를 하는 내가, 사람이 많든 적든 지하철의 핑크색 의자는 비워두고 싶은 내가 있다. 새로운 길은 또 그런 나의 걸음으로 길들여 질 것이다.


빈 줄의 가운데 자리에 앉아 괜스레 기분이 좋아졌다. 고작 지하철 자리 하나로 이렇게 진지할 일인가, 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고작 그런 자리 하나에도 쭈뼛쭈뼛 구석만 탐닉하던 내가 자발적 의지로 만들어낸, 나만 아는, 아니 나는 아는 변화, 작은 일탈이 꽤 뿌듯했다.
그리고 오래전 일상의 관성을 따라 그냥 내려버린 버스가 생각 났다. 그날 버스를 계속 타고 갔다면 보았을 하늘은 어떤 색이었을까? 바람에는 어떤 냄새가 섞여 있었을까?


집으로 돌아와 나는 그동안 차마 읽지 못하고 있던 작가의 책 한권을 주문했다. 그동안 내가 쌓아온 이유로 못했던 것들, 싫었던 것들과 부딪혀 보기로 한 것이다. 내가 정말 못하는 것인지, 그저 내 안에 갇혀 있던 것인지 알아 보기 위한, 늘 걷던 걸음을 새롭게 내딛었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그럼에도 불구하고, 빛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