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과 나의 첫번째 집은 서울의 동쪽 끝트머리에 있었다. 직장이 있는 서울 도심에선 다소 먼 거리에 있었지만 지은지 몇 년 되지 않은, 게다가 작은 원룸에서 시작된 서울살이가 전세 아파트로 승격되는 감동까지 더해진, 꽤 괜찮은 집이었다. 그러나 지하철 1호선을 지나는 그 ‘먼 거리’는 그때껏 짧은 통학/통근 거리에 익숙한 내가 감당할 수 있는 것이 못 되었다. 아침의 지하철을 탈 생각만 하면 심장이 두근거리고, 점차 피로가 누적되는 몸에 정체 모를 각종 질병이 찾아온 후 결국 1년만에 마포로 다시 이사를 했다.
그 뒤로는, 의도한 바는 아니지만, 대개는 2년, 적게는 1년도 안되어 집을 옮겼다. 집 자체의 문제가 있기도 했고, 돈이 문제일 때도 있었고, 집주인의 사정 변화 등 다양한 이유로 결혼 후 지금의 집에 정착하기까지 10년간 총 6번의 이사를 했다. 다행히(?) 전셋집을 전전하는 세입자의 눈물겨운 설움 같은 것은 없었다. 다만 계약기간이 지나면 떠나야 하는 집에 나의 취향을 입히는 것은 제한적이었고, 그러니 애착이 잘 형성되지 않았고, 가구와 물건들은 인테리어라기 보다 잠시 놓여진다는 말이 어울릴 상태로, ‘미(美)’와 ‘조화’ 같은 감상적 차원의 고려 없이 기능적 역할에 집중하며, 때가 되면 사다리차를 타고 이 집에서 저 집으로 보내졌다.
사람이 살다 보면 특별한 일이 없어도 자연스럽게 짐이 늘게 마련인데 그 와중에 두 아이까지 태어났으니 짐은 폭발적으로 늘어났고, 거주자의 의도와 편의를 위한 꾸밈이 아니라 방과 가구의 크기에 맞춰 테트리스 블록을 맞추듯 꾸역꾸역, 때론 생뚱맞게 배치된 가구를 보고 있으면 절로 한숨이 났다. 그때마다 마음으로 다짐한 것은 언젠가 온전한 우리의 집으로 이사하면 이것들을 싹 처분하고 그간 참아온 ‘조화’로운 ‘미’적 취향을 펼쳐 보이리라는 희망과 기대.
말이 좋아 미적 취향이지, 사실 내게 그런 감각은 별로 없다. 드디어 찾아온 ‘내가 먼저 손들지 않으면 이사를 하지 않아도 되는 집’으로의 이사를 앞두고도 낡은 가구를 버리고 새 가구를 사는 것 외에는 근사한 인테리어의 사례를 찾아본다거나, 비용을 투자한다거나, 돈 대신 내 품을 쏟아붓는 정성도 없었다. 대단한 것을 하지 않음에도 지금 집으로의 이사가 좋았던 것은 지속가능한 우리의 공간이 생겼다는 것, 다음 번 이사의 수고로움을 염두할 필요 없이 마음 놓고 짐과 마음을 풀어 나만의 취향을 입힐 수 있다는 것이었다. 말했듯이 나의 미적 감각은 별 볼일 없는 수준이라 내 취향을 입힌 집 역시 어디에 내놓을만큼 멋스럽진 못해도 내 눈에는 꽤나 흡족하다. ‘취향’이라 하면 뭔가 특별해야 할 것 같고, 때론 어렵게 들리지만 단순하게 생각하면 ‘무엇을 향해 스스로 흡족해 하는 마음’이 아닐까.
이 집에 봄에서 여름으로 그리고 가을, 겨울로 네 번의 계절이 흘렀다. 흐르는 계절마다 계절에 맞는 나의 취향을 입혔다. 그중 제일 마음에드는 것이 거실의 그림액자. 이제 마음껏 못질을 해도 되는 우리의 거실 벽에는 흐르는 계절을 따라 그 계절의 느낌을 담은, 남편과 내가 함께 고른 그림액자가 걸렸다.
다시 봄. 이 집에서 맞이한 첫번째 계절인 봄이 다시 돌아온지도 한참이건만 사계절의 완성후 아직 봄의 액자를 꺼내지 못하고 있었다. 심미적으로 부지런하지 않은 나의 취향이 벌써 시들해지는 것인가... 그것보단 마음이 바빠 액자하나 바꿔 걸 여유도 내지 못한 탓이 크다.
달력의 ‘4월’ 글씨를 보고 더는 미루고 싶지 않아 며칠 전 애써서 마음을 내어 모지스 할머니의 <봄> 그림을 걸었다. 액자 하나를 바꾸었을 뿐인데 창밖의 봄 기운이 밀려와 거실을 가득 채웠다.
액자 외에는 아무것도 달라진 것 없는 나의 상황도 봄바람처럼 한결 가볍게 느껴졌다. 나의 좋고 싫은 마음의 결과로 집의 곳곳에 뿌려 놓은 나의 취향들이 반대로 나에게 ‘취향의 기쁨’을 전한다. 움츠린 마음을 위로한다. 이것이 자신의 취향을 입힌, 마음을 편히 풀어 놓은 ‘자기만의 공간’의 힘이구나 생각해본다.
볕이 점점 뜨거워지면 노란 소파 위로 지난여름에 마련한 모네의 <트루빌 해변가의 판잣길>이 걸릴 것이다. 식탁 옆 테이블 위에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생타드레스의 테라스>를 올려 두어야지. 계절을 따라 흐르는 그때의 나의 취향은 더위로 너울거리는 여름의 열기를 또 얼마나 식혀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