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쥐 _ 박찬욱, 2009
내가 뱀파이어라 싫어요?
내가 뱀파이어가 안 됐다면 태주 씨랑 잤을 것 같아요? 내가 그냥 신부였어도 태주 씨랑 그랬을까? 신부가? 응?
원치 않게 뱀파이어가 된 것도 정말 억울한데 '겨우' 사랑하게 된 여자에게 외면까지 당하는 건 너무 억울하다. 물론 자신을 받아들여달라는 게 '인간'인 태주에게 무리한 요구라는 건 자기도 잘 안다. 그 억울함과 무리함이 엉뚱한 궤변을 낳는다. "내가 뱀파이어라서 싫어요?"에서 "뱀파이어가 안 됐어도 태주 씨랑 그랬을까?"로, 앞뒤가 안 맞는 논리를 마구 들이대는 상현의 모습에서 시종 차분하던 그의 내면이 얼마나 카오스에 빠져있는지를 알 수 있다. 처음엔 태주을 설득하기 위해 시작한 장광설은 길어질수록 점점 스스로에 대한 자기합리화에 가까워진다. 이 화장실 신은 박찬욱 감독도 박쥐에서 대사가 가장 좋았던 부분으로 꼽은 바 있다.
이 대목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상현을 연기한 송강호 배우를 언급하지 않는 건 극히 실례다. 사실 어떤 대사든 송강호에 의해 읊어지게 되면 그 대사는 (시나리오를 쓴 분들께는 미안한 얘기지만) 오롯이 '송강호'라는 맥락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구구절절한 대사의 전문을 다 옮겨 적고 싶기도 하지만 징하게 길기도 하고, 그래봐야 어차피 영화를 볼 때의 느낌은 절대 살릴 수 없다는 것을 알기에 뒷부분 일부만 아래에 옮겨본다. 간절하면서도 우스꽝스럽고, 진심이 느껴지면서도 앞뒤는 맞지 않는 이 기가 막힌 대사를 납득 가능하게 풀어낼 수 있는 배우가 송강호 말고 또 있을까? 적어도 난 떠올릴 수 없다.
아니,
교통사고 나서 다친 사람을 욕하는 법은 없잖아요. 누가 무슨 병 걸렸다고 비난하지는 않잖아요. 난 좋은 일 하러 거기 갔던 거에요! 내가 뱀파이어인 게 뭐가 중요해요? 태주 씨, 내가 신부라서 날 좋아했어요? 아니잖아요. 거 봐요, 신부는 그냥 직업이잖아요. 그런 것처럼, 뱀파이어인 것도, 그냥 뭐... 식성이나, 그냥, 뭐... 생활의 리듬 문제, 그런 게 아닐까? 아니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는데, 그게 뭐가 중요해요? 아니, 그게 아니고...
내가 뱀파이어라 싫어요?
내가 뱀파이어가 안 됐다면 태주 씨랑 잤을 것 같아요? 내가 그냥 신부였어도 태주 씨랑 그랬을까? 신부가? 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