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어로물을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배트맨은 흥미롭게 봤다. 슈퍼 히어로 중 유일하게 초능력을 쓰지 않고 박쥐를 두려워 해 배트맨이 된 설정이 마음에 든다. 두려운 대상에 맞서기보다 피할 수 있다면 잘 피해서 살아가는 게 좋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발이 닿지 않는 깊은 물에 대한 공포가 있었다. 박쥐를 두려워 한 그가 배트맨이 되었듯, 물을 무서워하니 물귀신이 되어보자 그런 생각이었는지도 모른다. 물 자체가 무서운 게 아니라 수영을 못해서 기피한 거라면 배우면 달라질 수도 있지 않을까. 불능, 공포, 기피의 관계를 해석하고 싶었다.
2009년 처음 수영을 배우기 시작했다. 딱 한 달만 해보고 재미없거나 여전히 무서우면 그만두자 생각했다. “별로면 그만해도 돼.” 뭔가를 시작할 때 이 생각은 여전히 유효하다. 너무 비장할 필요는 없다. 그러면 시작조차 못하고 쉽게 지친다.
자유형을 익히고 끝, 첫 수영은 오래가지 않았다. 두 번째 수영은 그로부터 1년 뒤였다. 이별의 터널을 걷던 시기,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면 우울한 생각이 머릿속에 그득했다. 좁은 병 안에 서 있는데 자꾸만 누군가 머리 위로 우울한 생각을 쏟아 부어 턱까지 가득 차는 느낌이었다. 회사 선배가 문화센터에서 수영할 수 있다고 알려주었다. 행여나 상대에게 연락이 올까 하루 종일 휴대폰을 붙잡고 있었는데, 수영 전에 휴대폰을 사물함에 넣어야 하니 좋았다.
나는 평소 생각이 많다. 그게 꼭 나쁜 건 아니지만 걱정으로 이어질 때도 있다. ‘자, 그동안 너무 많이 생각했어. 이제부터 생각하지 말자’는 다짐은 ‘코끼리를 떠올리지 말라’는 말처럼 별로 효력이 없는데, 수영하는 동안엔 그런 생각이 좀처럼 들지 않는다. 아직도 몇 분 남았네, 또 접영이냐 몇 바퀴째인가 하는 생각뿐이다. 레인 끝까지 멈추지 않고 가야하고 바른 자세로 하고 있나 스스로를 살피고, 뒷사람과 너무 가까워지진 않았는지 오로지 수영에만 생각이 한정되어 다른 고민에게 곁을 내주지 않는다.
일정 나이가 되면 평가 받는 것과 거리가 멀어진다. 학교처럼 학년이 달라지지도 않고 직장은 진급해도 한계가 있다. 그렇다고 계속 같은 상태인 건 아닌데 같은 구간에 머무르다 보니 대부분 익숙해진다. 그래서일까 일찍 일어나기 싫고 어떠한 핑계를 대서 안 올 수 있음에도 수영장을 찾는 건, 일터나 내 생활에 잘 없던 ‘성장’과 ‘변화’가 눈에 보이기 때문이다. 특히 이런 변화는 초급반에서 좀 더 자주 느낄 수 있다. 뜨지 못하던 지난 주의 나와 어떤 식으로든 물살을 가르는 나는 명확히 다르다.
나이가 들수록 시간이 빨리 간다고 느끼는 이유는 이미 많은 경험을 한 터라 매일 비슷한 하루를 반복하면 뇌가 이것을 한 덩어리로 인식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하여 삶에 약간의 변화가 필요한데 여기엔 꾸준히 뭔가를 배우는 게 도움 된다. 언어와 운동은 배움의 한계가 없어서 오래할 수 있다. 지인들이 내가 수영을 열심히 하는 걸 보고 혹시 대회에 나가려는 거냐고 묻는다. 나는 그저 지금 내 상태에서 조금 더 나아지는 걸 목표로 한다. 수영을 못할 때는 자유형만 하자고, 달성하면 나머지 영법을 다 할 수 있게, 이후엔 200미터를 쉬지 않고 해보자는 등 무한대로 목표를 만들 수 있다. 명확한 레벨도 없지만 그래서 더 오래할 수 있다.
수영을 배우라는 말을 하려는 건 아니다. 나는 여러 운동을 조금씩 해보았는데 비단 남들이 많이 하는 운동이 아니더라도 각자에게 맞는 게 있을테니 찾다보면 삶이 조금 덜 지루하지 않을까 싶다. 또한 모두가 운동할 수 있는 몸을 가진 것도, 그럴 여유가 없는 사람도 있고 운동의 공간이 모두에게 열려있지도 않기 때문에 - 나 역시 운동할 수 없었던 순간이 있었기 때문에 - 감사한 마음으로 오늘도 수영장에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