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소와 벚꽃은 예쁘지만
영화 <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에서는 두 형태의 인간관계를 볼 수 있다. 타인과의 관계에서 의미를 찾는 사쿠라(여주)와 혼자만의 시간을 즐기는 하루키(남주). 그 나잇대의 아이들이라면 잘 웃고 인기 많은 사쿠라를 동경하겠지만, 나는 단연코 남자 주인공편에 서겠다. 타인에게 인정을 바라고 거기서 내 가치가 얻어진다고 생각하면 피곤해진다. 내 가치는 스스로 상정해야 한다. 적을 일부러 만들고자 하는 사람은 없지만, 그렇다고 모두를 아군으로 만들려는 사람은 주위 사람들까지 지치게 만든다. 여차하면 이토록 노력하는 자신을 좋아하지 않는 상대를 적으로 몰고 가기도 한다. 내가 모든 사람을 사랑할 수 없듯 모든 사람도 나를 사랑할 순 없다. 타인과 자신 모두 지치지 않는 관계를 위해선 이 명제를 알고 있어야 한다. 타인의 평가에 일희일비하며 관심을 받으려고 애쓰는 삶보단 도서관에서 조용히 작가와 대화를 나누는 삶이 더 좋다.
10년 전에는 지금보다 일본영화를 많이 봤다. 개중에는 지금껏 회자되는 소위 인생 영화도 있다. 이와이 슌지, 고레에다 히로카즈, 이누도 잇신과 야구치 시노부 감독을 좋아한다. 모든 작품을 본 건 아니지만 기타노 다케시 감독도 나쁘지 않다. 그런데 위에 언급한 감독들을 제하고 요즘 우리나라에 개봉한 일본 영화들은 시놉시스가 뻔하다. 일본 영화가 옛날만큼 한국에서 흥행이 잘 안되고 - 애니메이션 제외- 요즘엔 워낙 대기업이 투자하고 배급하는 한국 영화를 밀어주다보니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와 한국 영화에 밀린 게 아닐까. 수입하는 입장에선 이미 일본에서 어느정도 평타를 친 작품만 들여 리스크를 줄이려는 것도 있다. ‘나는 내일, 어제의 너와 만난다’와 ‘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를 연달아 본 이후, 요즘 일본영화는 퇴보하고 있는 게 아닌가 생각했다.
귀여운 얼굴과 목소리를 지녔지만 작위적인 미소와 부자연스러운 연기는 주인공의 감정에 이입하지 못하는 참담한 결과를 만들었다. 귀엽고 상냥하며 언제나 잘 웃고 또 눈물이 많은, 하지만 죽게 될 운명에 처한 가냘픈 소녀는 남성 판타지에 부응한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같이 출연한 타 배우들보다 연기 실력도 많이 부족했다. 남자주인공을 연기한 두 배우의 연기가 – 오구리 슌이야 말할 것도 없고 –더 뛰어났다(특히, 오구리 슌의 결혼식장 연기가 참 인상 깊었다.)
포스터에 나온 곳이 어딘지 궁금해서 찾아봤다. 내년 봄에는 그곳에 벚꽃을 보러 가야겠다. 영화를 보고 얻은 건이 정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