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대의 신발을 신어보기 전까진 알 수 없다 아니 신는다고 해도 영원히
내 인생과 나 자신에 집중해서 사는 게 정답이다. 그러면 타인과의 비교에서 오는 자괴감, 불안, 우울 등을 겪지 않아도 된다. 타인의 불행을 기원하고 그것이 이뤄졌을때 겉으론 안됐다고 하면서 마음속으론 기뻐하거나 이렇게 겉과 속이 다른 자신을 비난하다 다시 극복하는 둥 복잡한 여로를 걸을 필요도 없다. 타인의 삶을 알아봤자 선택할 수 있는 건 대개 동경 아니면 비난뿐이다. 인간이라는게 그렇게 대단하지가 못해서 타인의 생을 그저 그대로 인정하기까지는 오랜 시간과 많은 수련이 필요하다.
자신의 삶을 인정하고 받아들이기까지 불안한 마음을 지니고 살 때 우리는 타인의 삶에 자주 눈을 돌리게 된다. 행운은 남의 것, 고통은 언제나 내게만 오고 나는 이렇게 노력해서 겨우 얻은 결과를 누군가는 그저 쉽게 손에 넣은 것 같다. 타인의 삶이 쉽고 멋져 보이면 선택은 두 가지다. 그의 삶을 트집 잡거나 자기 합리화를 시작하거나. 특히, 오랜 시간 함께해 온 관계라면 좌절감과 질투는 관계의 깊이만큼 더욱 커진다.
나는 학창시절까지는 칠월처럼 지내다가 대학교에 들어가면서부터 조금은 안생의 삶에 가까워진 것 같다. 사실 안생의 삶은 자유분방하다 못해 궤도의 끝을 넘어선 모습이라 둘의 중간 어디쯤에 있다고 말할 수 있겠다. 초등학교와 중학교 시절, 잠잘 때를 제외하고 거의 모든 시간을 공유했던 친구들은 각자의 길을 찾은 지 오래다. 영화에서 말하는 스물일곱을 우리는 진즉에 지나왔고 결혼하고 애를 낳아 또 다른 행로를 개척한 이도 있다. 우리는 20년이 넘는 세월을 알고 지냈지만, 요즘은 일년에 겨우 서너 번을 만날 뿐이다. 나이가 들면서 저 친구를 더 잘 알게 됐다는 생각 대신 내가 저 사람을 잘 모를 수도 있다는 걸 인정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여전히 관계는 소중하다. 가족을 제외하고 열두 살의 나를, 스무 살의 나를 기억하는 거의 유일한 사람이니까.
영화의 완성도가 뛰어나다고 할 순 없다. – 나는 반전이 있다는 말이 싫다. 이 말을 듣게 되면 영화 보는내내 계속 반전을 예측하게 된다 – 최루성 감정의 실마리를 얹거나 복선을 반복해서 드러내는 것도 영화의 완성도를 떨어뜨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를 포기하지 않고 집중하여 보게 만드는 것은 두 주연배우의 뛰어난 연기 덕분이다. 서로를 가장 사랑했다가 그래서 가장 많이 화나고 또 오랜만에 보면 너무 반갑고 물어보지 못해 오해가 생겨 마침내 감정이 폭발하는, 그 모든 복잡 미묘한 감정들을 너무나 섬세하게 담아냈다. 안생은 여러 번 웃지만 그 미소가 장면마다 너무도 달라서 그녀의 마음을 고스란히 이어받을 정도다. 특히 베이징 집 안의 욕실에서 두 여배우의 연기가 압권이었다. 영화를 보고 나면 아마 오래 전 함께 샤워를 했던 친구가 생각날 것이다. 비록 친구의 신발을 내가 대신 신어보진 못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