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경한 딕체니 낯설지 않은 사건 거대한 결과
미국의 정치사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는가. 영화 바이스를 보기 전에 자문했다. 이 질문은 내가 얼마나 영화를 잘 따라갈 수 있는가를 가늠하는 척도가 된다. 미국의 초대 대통령 워싱턴, 에이브러햄 링컨, 닉슨의 워터게이트 사건 - 신방과라면 알 수밖에 없는 - 케네디와 루스벨트, 아버지 부시와 아들 부시, 클린턴, 오바마와 오렌지 대머리까지. 지극히 최근 대통령 위주의 이름과 얼굴뿐, 그들의 업적을 묻는다면 먼 산을 바라볼 심산이 크다. 하긴 남의 나라 정치사에 관해 완벽히 알아야 할 의무 또한 없으므로 이 정도도 그 나라가 다른 곳이 아닌 바로 '미국'이기 때문이다. 변방의 작은 나라, 한국 국민에게도 영향력을 미치는 나라. 미국 부통령의 이름을 하나도 말할 수 없는 것 또한 당연하다. 바이스를 접했을 때 딕 체니라는 이름이 생경했다. 하지만 그가 벌인 일은 전혀 낯설지 않은 게 우리가 이 영화를 봐야 하는 당위를 부여한다.
911 테러가 터졌던 날을 생생히 기억한다. 수학여행으로 간 제주도에서 일정을 마치고 숙소에서 쉬고 있는데, TV를 켜니 쌍둥이 빌딩에서 연기 나는 장면이 나오고 있었다. 담임은 숙소를 돌아다니며 3차 대전이 터질지도 모른다며 잘 생각해보라고 예의 밑도 끝도 없는 말을 하고 떠났다. 제주에서 돌아온 나는 여느 때와 같은 학교생활을 영위해 나갔는데 이따금 미국이 전쟁을 준비한다든지 탈레반, 알카에다, 이라크 등의 단어가 들려왔다. 자세히는 몰라도 전쟁이 무엇을 증명하지도 상황을 해결하지도 않는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전쟁은 철저히 일으킨 사람에게만 득을 가져다줄 뿐이며, 이는 이라크 침공 뒤 핼리버튼(딕체니가 대표였던 석유회사)의 주식이 500% 상승했다는 사실이 이를 뒷받침해준다.
(에이미 아담스의 연기 또한 인상 깊다. 딕 체니가 병원에 입원했을 때 이 선거를 포기할 수 없다면서 와이오밍주에서 자신을 무시하던 남성들 앞에서 연설을 이어나가던 장면. 그 당시 미국에서 아무리 똑똑하고 능력 있는 여성이라도 유리천장을 깨기 어려운 현실을 에이미 아담스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아담 맥케이의 전작 빅쇼트를 흥미롭게 봤다면 바이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미국의 정치와 경제에 관심 있지만, 다큐나 두꺼운 책을 통해 배우는 건 내키지 않는 사람에게 단기 속성 미국 정치사 학습에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 빅쇼트도 그렇지만 미국의 정치에 사전 지식이 있으면 덜 지루하고 더 집중해서 볼 수 있다. 요 며칠 계속 미국 감독의 영화를 연달아 보니 미국 이야기를 주입 받는다는 느낌이 든다. 자국에 관한 영화를 만들고 - 그게 꼭 미국을 옹호하지 않더라도- 전 세계로 배급할 수 있는 것도 결국 자본과 권력이 있기에 가능하다. 더 많은 걸 가진 사람이 자신과 자신의 나라에 대해 보다 많이 얘기하고 들려줄 수 있다. 아무도 에티오피아나 말레이시아의 정치에 알지도 못하고 알 필요도 없다고 생각한다. 더 많은 것을 가질 수록 더 자세히 보다 자주 말할 권리까지 얻는 건 씁쓸하지만 인정해야 할 사실이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