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모스크바 호텔 ‘PETER 1(отель ПётрI)'
그때 나는 루이 14세가 열네 살인 줄 알았다. 그렇게 안다고 해도 아직 열넷의 문턱도 넘지 못한 아이에게 문제 되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그저 그뿐이다. 아니, 모든 왕에 적용된다면 우리나라도 세종 15세, 광종 6세가 있어야 하는 것 아니냐며 읊조렸지만, 이는 서양의 작명 방식에 관한 몰이해에 기인한 착각이었다. 아버지께서 딸 이름을 뭐로 지을까 고민하다 평소에 존경해왔던 하지만 한 번도 뵌 적 없는 증조할머니의 이름을 따서 내 이름을 지었다면, 나는 밀레니엄의 환희로 가득 찬 21세기에 시험지와 교과서에 이름을 적을 때마다 김순득 여사의 소슬했던 삶을 떠올리며 살아왔을지도 모른다(사실 증조할머니의 성함은 모른다.) 여하튼 자연스레 루이 14세의 비밀을 안 뒤로 이에 관해 얘기하는 건 지금이 처음이다. 무지에서 오는 부끄러움은 찰나지만 거기서 얻는지식은 영원하다.
이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지난여름(2016년8월) 모스크바를 여행할 때 묵었던 호텔 때문이다. 모스크바에서 머문 호텔은 ‘PETER I(러시아어: отель Пётр I)인데, 표트르 1세 또는 표트르 대제라고 불리는 이 사람을 모르는 러시아인은 아마도 없을 것이다. 호텔은 1895년에 지은 건물을 2006년에 개보수하여 지금과 같은 형태가 되었다. 외국 여행을 하다 보면 이런 호텔들을 종종 보는데 루마니아 부쿠레슈티의 힐튼 호텔도 역사적으로 의미 있는 건물을 개보수했다. 서울에선 60년 이상 된 건물을 찾기가 어렵다. 리노베이션을 했다고는 하나 200년이 넘도록 건물을 유지해왔다는 사실이 가히 놀라울 따름이다. 호텔의 이름으로 알 수 있듯 체인은 아니며 표트르 대제의 이름을 땄으니 우리나라로 치면 세종호텔쯤 되려나.
호텔은 접근성이 좋은 곳에 있다. 주요 관광지를 대부분 걸어갈 수 있고 다소 먼 곳은 가까운 지하철을 이용하면 된다(주변에 지하철역이 3개나 있다) 리셉션 직원도 친절했는데 그 증거는 나의 메모에 있다. 축소주의 인간임을 보여주는 석 줄짜리 메모에 ‘여직원이 친절함’이 최상단을 차지하는 걸 보면 러시아에 와서 처음 만난 이 러시아인의 친절과 미소에 상당히 감복한 것 같다.
아침식사 얘기를 빼놓을 수 없다. 이것은 좋다,가 아니라 가히 놀라운 수준인지 다시 그 석 줄짜리 메모에 ‘AWESOME’으로 표기되어 있다. 물론 이 또한 사진이 없어 증명하긴 어렵지만. 비루한 기억을 되새김질해보니 제대로 소문난 잔칫집처럼 콘티넨털 뷔페에 러시아식 아침 메뉴도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우리가 정말 맛있는 음식을 보면 촬영을 망각하고 수저부터 들지 않는가? 그렇게 생각해주면 참으로 고맙겠다.
어느 나라든 그 나라의 왕, 정치가, 작가 등 유명인 이름을 딴 호텔들이 있기 마련이다. 프랑스 니스에서 묵었던 숙소도 '빅토르 위고 호텔'이었다(숙소 강아지의 이름은 코제트였다.) 이왕 표트르 대제 호텔에 온 김에 그가 어떤 사람인지 앞으로의 러시아 여행에 도움이 될까 하여 조사해보았다.
표트르 대제는 한마디로 ‘근대 러시아의 기반을 다진’ 통치자였다. 1682년부터 1725년까지 재위한 표트르 1세는 키가 213cm에달하는 장신에 강인한 체력을 지녔고 여러 분야에 막대한 관심을 보였다. 서유럽에서 15개월 동안이나 머무르며 산업기술을 적극적으로 익히고 후에 러시아로 돌아와 이를 최대한 반영했다. 그는 폭군이기도 했는데 어느 때는 반란자 84명의 머리를 칼로 베었다고 전해진다. 전쟁광이라는 의심이 들 정도로 국경을 맞댄 지역과 자주 전쟁을 일으켰고 그 결과 러시아는 훨씬 더 강한 국가로 부상했다. 무엇보다 지금 러시아의 제2의 도시인 ‘상트페테르부르크’를 건설한 것이 표트르 1세의 두드러지는 업적이다. 수많은 전쟁과 전투기록을 살펴보아도 상트페테르부르크를 건설하면서 죽어 나간 노동자의 숫자만큼 많은 희생을 치른 적은 없을 것이다.”고 역사학자 클류체프스키는말한다. – 책 <처음 읽는 러시아 역사>에서 발췌
도시하나를 새롭게 창건한 그의 위대한 업적이야 나 말고 찬양할 이가 많으니 더 말하진 않으련다. 다만 그저 '반란자'로 기록된 84인과 도시를 건설하면서 죽음을 맞이한 이름 모를 수많은 노동자의 삶은 어땠을까. 감히 헤아리기조차 어렵다. 아무래도 정치인은 호텔 이름에 그다지 좋은 선택은 아닌 듯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