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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네이 Feb 21. 2021

피자가게 앞 어른들의 바톤터치

비록 당근이세요는 없었지만

비로소 오늘 당근마켓을 통한 첫 거래가 이뤄졌다. 당근마켓 같은 새로운 수단이 트렌드가 되어도 대체로 심드렁하다. 요새 이게 유행이래 그러면 그래 그게 유행이구나 잘해보렴, 한다. 그럼에도 뭔가를 해야 한다면 계기는 결국 일이다. 새 프로젝트 제안에 당근마켓 활용을 넣었는데 방안을 구체화 하려니 사용하지 않고는 알 수 없었다.


이것저것 눌러보니 브랜드에 적용할 부분이 많진 않았다. 지울까 하다가 한 번도 사용하지 않은 미개봉 고양이 화장실 모래가 눈에 들어왔다. 일전에 회사 게시판에 무료나눔으로 올렸는데 홍보차 올린 고양이 사진에 귀엽다는 댓글만 잔뜩 달렸다.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며 모래 포장지에 붙은 먼지를 닦아내고 볕이 좋은 곳에서 사진을 찍었다. 냥이들은 뭔가 자기한테 주는 건가 싶어 다가와서 기웃거린다. 아이들의 작고 동그란 머리통이 모래와 같이 찍혔다. 의도한 건 아니지만 고양이 집사의 진정성까지 노출되겠군.


검색해보니 한 개에 6천원이다. 두 개를 판매할 거고 배송비까지 포함하면 족히 15,000원이 있어야 살 수 있다는 건데, 돈 벌 목적이 아니라서 그냥 천 원을 적었다. 두 봉이니 하나에 500원인 셈, 아마 사는 사람들은 무료와 진배없음을 알 것이다. 판매이유와 물건 개수, 상태를 간략히 적고 완료 버튼을 눌렀다. 과연 오늘 내에 무슨 반응이 있으려나.


이럴 수가. 등록한 지 1분도 되지 않아 예닐곱명의 사람에게 채팅이 왔다. 정신이 혼미했다. 일단 뭔가 해야할 것 같아 가장 먼저 연락한 사람에게 회신 했다. 처음엔 확인만 하고 답을 나중에 보낼까 했는데 중고나라의 댓글과는 다른 시스템인지 응답을 빨리 해야 하는 것 같았다. 어차피 팔 거라면 빠르게 시간을 정하고 거래하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모래가 무거워서 멀리 나갈 수 없으니 집 근처 한 가게를 거래 장소로 말하니 거기까지 오겠다고 한다. 무료나눔에 목 마른 당근은 판매자가 요청하는 시간과 장소에 와야 하는구나. 대충 알겠다. 그간 마음의 상처를 입은 이들이 판매글에 방어적으로 쓴 멘트를 보며 대략 어떤 진상이 있는지 알 수 있었다. 밤 늦게 연락하거나 거래 시작 시 인사하지 않는 사람, 마음대로 가격을 깎으려고 하는 사람 등 지인에게 들어보니 저런 건 기본이고 더 다양하다고 한다.


저녁 약속에 가기 전 바로 건네고 버스를 타려 했는데 구입자에게서 늦을 것 같다는 채팅이 왔다. 시간 약속을 잘 지키는 것도 매우 중요하다. 사실 당근마켓 거래에서 중요한 건 그다지 특별하지 않다. 인사, 시간 약속, 존댓말 등 타인과 관계맺기를 할 때 가장 기본적인 요소다. 그 사람도 사정이 있겠지만 저녁 약속에 늦어질까봐 조금 걱정됐다. 그렇다고 어디 맡길 곳도 없고 첫 거래니 대면하고 싶었다. 궁극적으로 그는 만나기로 한 시간보다 8분 가량 늦었다.


약속 장소에서 우리는 서로를 1초만에 알아보고 "아아" 외쳤다. 내가 쇼핑백을 열어 모래를 보여주려고 하자 "아뇨 안 보여주셔도 돼요!!" 하고 다급하게 말했다. 모래를 보여주려고 굽혔던 허리를 펴니 그제서야 상대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 분은 천원을 두 손으로 공손하게 쥐고 있었다. 마치 귀중한 상장을 건네듯. 거의 무료나눔인데 빈손으로 와서 죄송하다는 말도 덧붙였다. 만나기 전 채팅으로 나눈 몇 마디가 훨씬 많을 정도로 거래는 이어달리기의 바톤터치 같았다. 무슨 일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우린 약속이나 한 듯 황황히 서로 다른 방향으로 걸어갔다. 손이 시려 패딩 주머니에 손을 넣었을 때 안에 바스락거리는 천 원짜리 한 장만이 지금 있었던 일을 확인시켜 주었다.

 

그는 어느 방향으로 걸어갔을까. 모래가 무겁다는 것을 알고 가방도 들고오지 않은 것 같았다. 실은 얼굴이 잘 기억나지 않는다. 마스크를 쓰고 있기에 눈만 보였고 목소리도 특별하지 않았다. 아마 거리에서 마주친대도 우린 서로를 알아볼 수 없겠지. 가까운 동네 주민도 아니라서 만날 일이 더 없긴 하겠지만. 주머니에 든 천원을 만지작거리며 약속 장소를 가는 동안 좀처럼 느껴보지 못한 여러 모양의 감정이 고개를 내밀었다. 무사히 첫 거래를 마쳤다는 것에 대한 안도와 고마워하는 이를 봤을 때의 뿌듯함도 그중 하나다.


대면해 물건 판매한 게 처음은 아니다. 대학생 때 공모전에 수상해 받은 경품을 팔았던 적이 있다. 전자기기였기에 가격은 그때가 더 나갔다. 내가 쓰지 않아서 오래도록 공간만 차지하고 있을 불필요한 제품이 누군가에겐 먼 곳까지 직접 와 가져갈 만큼 중요한 물건이 된다는 사실에 물건을 다시 보게 된다. 그냥 버릴 수도 있지만, 물건에 2차 생명을 부여해주어 자원 활용에 도움 된다. 의류기부함이나 아름다운 가게에 기부할 수도 있지만, 사실 그게 누구한테 가는지는 알 수 없다. 대화를 나누고 약속을 잡으면서 이 물건을 직접 가져갈 사람을 알게 되는 것. 그래서 과정에서 빚어지는 수고로움이 건네고 나면 뿌듯함으로 돌아온다. 이는 중고나라나 기부함을 이용할 때와는 확연하게 다르다. 


당근마켓이 실제로 개인의 수익 창출이 아닌 커뮤니티 형성을 위해 만들어졌는데 이는 조금만 써봐도 알 수 있다. 동네생활 카테고리에선 붕어빵을 파는 곳을 묻기도 하고 얼마 전엔 누군가 길에서 품종묘를 봤다는 제보를 해 실제로 고양이를 잃어버린 집사와 연결되기도 했다. 신용카드를 주웠으니 연락달라는 사람과 동네 편의점 온장고 위의 고양이 소식을 전하는 사람도 있다. 세상 어딘가에서 일어날 일이지만, 그게 바로 내가 아는 내 집 주변이기 때문에 내 일처럼 느껴지고 확인하는 재미가 있다. 내가 사는 내 동네를 조금 더 잘 알게 되고 이 동네가 조금은 살만한 곳임을 느낀다.  


비록 내 첫거래엔 당근이세요도 식빵도 없었지만 아직 앱을 지우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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