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상견례를 결혼식 하루 전에 했다. 결혼 날짜도 방식도 내가 알아서 정한 뒤 말하는 게 못마땅했던 아버지는 속이 상했고 결혼식을 올리기 전까지 아버지와 나의 사이는 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미국과 소련처럼 냉랭했다. 결혼식 날짜는 순전히 장소 때문이었는데, 회사 앞 정원에서 하기로 한 뒤, 야외결혼하기에 그다지 춥지 않으며 그런데도 미룰 수 있을 만큼 미룬 날짜여야 했다. 회사 사옥 이전을 내년에 앞두고 있기에 올해(2014) 안에 몹시 춥지 않은 날짜가 되어야만 했고 그래서 10월 마지막 주 주말이 되었다. 아버진 내가 말한 시점에서 1년 뒤인 3월에 하는 게 어떻겠냐고 하셨으나 3월이어야 하는 이유가 내게 별로 와닿지 않았다. 어차피 식이 그리 중하지 않으며 내 돈으로 집 사고 식을 올리는 것이므로 아무렴 상관없었으나 아버진 어쩐지 그게 서운했던 것 같다.
모두 다 내 마음대로 하는데 뭐 굳이 상견례를 하냐며 아버지의 화와 서운함을 눌러 담아 나를 향한 보이콧으로 투영된 게 바로 상견례를 안 한다는 입장이었는데 나도 그럼 그러시라고 했다. 우리 부녀는 모두 고집이 세다. 문제는 이런 상황을 그대로 전달하기 어려웠던 반려인과 그의 부모가 상견례를 기다린다는 사실이었는데, 그는 어떻게든 설득해보고 정 안 되면 안 해도 되니까 너무 염려 말라고 했다. 어쨌든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 미리 서울에 올라오신 반려인 부모님으로 인해 하루 전에라도 보는 게 어떠냐는 얘기가 나왔고 나도 냉전 상태에서 마지막 화해의 손을 내밀면서 아버지를 회유해 어려운 모임이 겨우 성사되었다.
예상했지만 그 자리는 모두 좋은 의도로 만났음에도 꽤 불편했다. 반려인과 나는 서로의 부모가 선을 넘지 않고 예를 갖추면서 서로의 마음을 상하게 하는 말을 하진 않을지 걱정과 의심의 눈초리를 쉬이 거두지 못했다. 다행히 그날 대화에서 상처 될 만한 단서는 나오지 않았다. 나에게 불만을 느끼고 있던 아버지도 그날은 전혀 내색하지 않았다. 나에게 화났다는 것보다 미래의 시부모 앞에서 기죽지 않는 게 더 중요했던 아버지 나름의 노력이었을지도 모른다.
나는 30여 년간 어디에서도 듣지 못했던 부모의 과거를 상견례 자리에서 처음 들었다. 대학 때 방송 쪽을 전공해 그쪽에 지인들이 많다는 얘기만 들었지 아버지가 KBS 기자를 했다는 사실은 알지 못했다. 엄마가 미스롯데인지 미스가나인지 출신이라는 얘기도 처음 들었고 5.18 광주민주화운동이 보도된 내용보다 훨씬 참혹했다고 얘기할 때는 그 자리에 있던 모두가 아버지의 이야기를 들으러 온 마을 어귀 구경꾼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상견례로 얻은 게 있다면 아버지의 20대를 아주 약소하게나마 알게 된 것이다. 나는 그날 이후로 아버지에 대해 더 알지 못한 답보 상태에 있다.
결혼한 지 7년이 되어가는 지금까지 상견례의 조합으로 만나는 일은 없었다. 그 순간이 좀처럼 만날 일 없는 사람끼리의 처음이자 마지막 회담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결혼식 당일에 처음 만나 인사한대도 괜찮았을 것 같다. 서로의 행복을 위해서 필요한 건 부대끼고 어울려 어색함을 탈피할 자리를 만드는 게 아니다. 만약 부부 중 한 명이라도 명절에 부모의 집에 가는 걸 꺼린다면 상대방이 조금이라도 힘들어하는 자리를 만들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 물론 나도 결혼한 뒤, 몇 년간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40~50명 되는 반려인의 작은할아버지, 당숙 등 낯선 분을 찾아뵙고 세배까지 했고 그 순간은 몇 해간 가장 불편하고 힘들었다. 이제는 과거가 되었지만 그땐 그랬다.
시부모가 얼마나 좋은 사람인지, 내 부모가 얼마나 다정하고 쿨한 사람인지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그저 그 자리에 한 명이라도 불편한 사람이 있다면 횟수를 줄이거나 방안을 찾도록 노력하는 게, 이 만날 일 없는 사람들의 만남으로 인한 고단함을 줄이고 행복을 향해 나아가는 유일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