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 축사는 혼자 하세요

하객의 시간은 소중하니까

by 중앙동 물방개

친구의 결혼식에 갔다. 주례 없는 결혼식이지만, 주례만 없을 뿐 거의 모든 것이 있었는데 친구 남편의 친구(남성)가 축사하러 나왔다. 그는 먼저 유부 월드 입성을 축하한다며 운을 뗐고 자신이 먼저 결혼했으므로 인생 꿀팁을 다섯 가지만 알려주겠다고 했다. 그저 먼저 결혼했다는 이유로 충고할 수 있는 위치라는 생각 자체가 첫 단추를 잘못 끼운 듯했지만, 단추가 잘못되어도 옷은 입을 수 있기에 한번 들어 보기로 했다(양옆에 친구들이 앉아 있어 쉬이 나갈 수도 없었지만, 글의 소재가 되리란 기대도 있었다)

첫 번째 팁. "신혼은 아주 좋을 수 있습니다. 다만 OO(남편의 이름)은 내년 설에 XX씨(내 친구이자 아내)가 시댁에서 설거지하는 뒷모습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언성을 높이고 싸울 수도 있겠죠. 이때 서로 잘잘못을 따지기보다 말로 잘 풀고 서로 이해하려고 해야 합니다."

와! 속으로 탄성이 터져 나왔다. 이들이 명절을 어디에서 어떻게 보낼지 단정할 수 있나. 명절 시가에서 아내의 설거지가 다툼의 원인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이 있다면, 그 다툼이 어디에서 기인하는지를 먼저 짚어보고 예방할 수도 있지 않은가. 어떤 행동이 불을 낼 것 같으면, "오! 불은 분명 날 텐데요, 일단 잘 끄십시오."가 아니라, 불이 나지 않기 위해선 어떻게 하라는 게 더 맞다. 그래, 그대의 가설대로 명절에 이 부부가 남편의 집에 갔다고 치자, 그렇다면 설거지하는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을 게 아니라 "설거지는 본인 집에서는 본인이 합시다" 등의 방책은 생각하지 못하는 걸까. 무엇 보다 싸우더라도 잘잘못을 따지지 말라고 했는데, 잘못은 시가에 가서 설거지하는 아내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한 남편에게 있는데 어찌 따지지 말라는 말씀이오. 내가 제일 싫어하는 인간이 항상 하는 말은 젠더 이슈가 발생하면 '남녀 문제를 떠나'라는 말이다. 그것이 문제인데 떠나긴 어딜 떠나. 가부장제에 기대어 살아온 남성은 이런 문제의 원인, 분노의 시발점에 대해 생각하는 대신, 발생 후 결과에 대해서만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를 말한다. 대체로 아내를 위한 발 마사지, 명절 증후군을 극복하는 팁 따위다. 난 그가 말한 이 첫 번째 팁이 절대 두 부부의 문제를 해결해주지 않으리라 확신했다.

두 번째 팁. "설거지와 빨래 같은 소소한 집안일은 남편이 하는 겁니다. 대신 집안의 대소사는 아내가 챙기십시오." 거대한 일은 아내가, 일상적인 집안일은 남편이 하라는데 본인이 뭔데 남의 가사 역할 분담을 해주는지. 게다가 가사노동을 소소하다고 오판한 건 '전국 가사노동 한 번이라도 해본 사람의 모임'에서 들고 일어날 일이다. 가사노동을 남자가 하라고 하면 여성들이 손뼉 치고 깨어있는 남자라 칭찬하리라 생각했을까. 가사노동은 결코 소소하지 않기에 전제부터 틀려서 기대에 부응해줄 수 없다.

세 번째 팁. "부부 사이엔 비밀이 없어야 합니다. 비밀이 생기다 보면 싸우게 됩니다." 표면적으로 듣기엔 별문제 없어 보인다. 그런데 이 말이 어떤 원칙이 되어 부부사이에 표어처럼 작용되면 휴대폰 보기, 카드내역 공개 등을 통해 그 관계가 더 돈독해지기 보다 불신하고 오해를 쌓을 심산이 크다. 친구 사이엔 서로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믿음이 없으면 싸우게 됩니다, 이런 말과도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은데 이게 무슨 대단한 조언이라고. 예상은 했지만 첫 번째부터 세 번째까지 별로 팁이라고 할 만한 것은 없었다.

결혼식에 웬만하면 가고 싶진 않지만, 사회생활을 하다 보면 어쩔 수 없이 결혼식에 가게 되고 대개 이런 형태의 축사, 성혼선언문을 듣게 된다. 페미니즘을 공부한 사람도 만족할 수 있는 오랜 지식과 깊은 사고에서 우러나온 좋은 축사는 어떤 내용일까. 만약 내가 축사를 요청 받으면 무슨 말을 할 지 고민해 보았는데 일단 축사라는 게 필요한지 확신이 서지 않으므로 거절할 가능성이 높다. 더불어 내가 고심해서 어떤 말을 하든 대공황을 지낸 부부의 부모들의 낯빛을 어둡게 만들 수 있다. 그래도 혹시 '꽤 나쁘지 않은 결혼을 위한 좋은소리 위원회'에서 100만원 정도로 초대해주신다면 준비해보겠습니다.

(나머지 두 팁은 어디있냐 하면 세 번째 팁까지만 듣고 집중력이 많이 흐려졌습니다. 이미 느끼셨겠지만, 첫번째 팁에서 너무 집중, 실소가 터진 끝에 글감은 충분히 나왔다고 생각해서 청각이 작동하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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