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술의 홍수 속에서

<올해의 주제>

by 노랑자

2025년 나의 한 해를 지배한 키워드는 단연 'AI'였다. 올해는 AI가 단순히 지적 활동을 돕는 보조 도구를 넘어, 실질적인 과업을 직접 수행하는 '실천적 지능'의 단계에 도달했음을 확인한 시간이었다. 뉴스 헤드라인과 유튜브 피드에 AI가 빠지는 날이 없었고, 나의 일상 또한 AI라는 홍수에 깊숙이 잠겨 있었다. 직장은 물론이고 여가 시간과 가족과의 대화 속에서도 AI라는 주제는 끊임없이 이어졌다.


직장에서의 한 해를 돌아보니 수행한 프로젝트의 92%가 AI 관련 사업이었다. 특히 공공기관과 은행에 생성형 AI 시스템을 도입하는 일에 대부분의 시간이 투입됐다. 이들 기관의 공통점은 모든 업무가 명문화된 가이드라인과 매뉴얼에 기반한다는 점이다. 규정대로 움직여야 하는 조직 특성상 AI를 통한 자동화의 잠재력이 크지만, 동시에 AI가 '환각(Hallucination)'을 일으켜 잘못된 정보를 제공할 경우의 리스크도 매우 크다. 말하자면 AI에 대해 가장 뜨거운 호기심과 가장 차가운 우려를 동시에 품고 있는 곳들이다.

주로 투입됐던 프로젝트는 '제안' 작업이었다. 제안의 특성 상 시스템을 현실에 구축하거나, 고객에게 컨설팅을 하는 등 가치를 제공하는 일이라기보단 포장하는 일에 가깝기에 남는게 상대적으로 없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금융권의 디지털 전환 행보와 인프라 현황, 그리고 글로벌 빅테크와의 현실적 기술 연계 방안을 확인 할 수 있는 귀한 공부의 시간이었다.

이런 아쉬움을 해소해준 계기는 한 공공기관의 AI 플랫폼 구축 컨설팅이었다. 제안서 속 문구가 아닌, 파트 리더로서 현장의 실무를 이행한 첫 경험이었다. 팀장님께 "이행 현장에 나가고 싶다"고 노래를 부른 끝에 얻은 기회였다. 현장에서 공무원들을 인터뷰하고 DB 속 데이터를 검증하며 기관에 필요한 머신러닝 과제를 발굴했다. 사실 과제 도출보다 어려웠던 것은 경직된 조직문화였다. 자료 하나를 받는 데에도 '공문'이라는 격식을 차려야 했고, 지연되는 회신과 행정 문서 처리에 스트레스를 받기도 했다. 하지만 정성적인 현장의 목소리와 정량적인 데이터를 엮어 실행 가능한 설계도를 그려냈다는 점에서 큰 보람을 느꼈다. 이제는 건축이 아닌 시스템을 설계하는 일을 하지만, 어느쪽도 결국 해답은 동료들과 치열하게 고민하고 대화하는 길 위에 있음을 다시금 확신했다.


여가 시간도 변했다. 한동안 '좌표의 발견'이라는 이름으로 도시와 건축에 대한 애정을 담아 글을 써왔지만, IT 업계에 몸담은 지 1년 반이 지나자 시야가 달라지기 시작했다. 내가 가진 시간을 주업무와 시너지를 낼 수 있는 곳에 투자하는 것이 더 유익하겠다는 판단이 섰다.

그렇게 퇴근 후에는 AI 관련 주식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최신 트렌드를 정리하고, 엔비디아 같은 인프라 기업들이 만드는 기술에 대해 이해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비록 지금 내 계좌에는 파란 비가 내리고 있지만, 이 비가 그치고 나면 단단한 눈덩이가 뭉쳐져 언젠가 듬직한 '불로소득의 눈사람'으로 자라나길 바라고 있다. 물론 매일같이 쏟아지는 AI 뉴스의 속도를 따라잡는 일은 쉽지 않다. 알림은 쌓여가고 정보의 피로감이 몰려올 때면 결국 ASMR 영상으로 도망치기도 하지만, 무언가에 꾸준히 마음을 기울인다는 것 자체가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를 새삼 깨닫는다.


가족과의 시간조차 AI라는 화두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유럽에서 시각 디자인을 전공하고 있는 동생과는 AI를 바라보는 비판적 시각에 대해 자주 이야기를 나눴다. 기술이 모든 것을 '뚝딱' 만들어주는 시대일수록, 다시 기본으로 돌아가 펜을 잡고 코딩을 하며 물리적인 감각을 익히는 동생의 학습 방식은 신선한 자극이었다. 나 역시 아무것도 없는 백지 위에서 상상력이 가장 극대화된다고 믿는다.

시댁 식구들을 만나는 날은 일종의 'AI 포럼'이 열리는 날이다. 교육 현장의 AI 도입을 이끄시는 아버님과 각자의 영역에서 겪는 PoC(기술 검증)의 경험을 나누곤 한다. 한편으로는 며느리로서 나름의 지적 자극을 드려야 한다는 압박감에, 차 안에서 제미나이에게 최신 시사 이슈를 물어보며 '예습'을 하기도 한다.


돌이켜보니 2025년은 나에게 AI라는 거대한 홍수에 휘말려 살기 위해 뗏목을 붙잡는 한 해였던 것 같다. 화면에서 손쉽게 접하는 AI의 답변 뒤의 거대한 세계를 알아갈수록 인류의 대담함에 감탄하기도 하지만, 감탄이 이 너무 잦아지는 바람에 쉽게 지쳐버리기도 했다. 그래도 SI(시스템 통합)업에 와서도 건축에 있을 때와 같이 느끼는 것은, 기술 뒤에서는 사람들이 지지고 볶으며 지난하게 하나하나를 만들어가고 있다는 점이다. 내년의 나는 이 홍수에서 뗏목위에 올라가 한숨은 돌려가며 표류할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그러다 범선을 만나면 더 좋고!)


트럭 =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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