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노승주 Sep 24. 2021

보존의 시대

이서수 - <미조의 시대>에 대한 짧은 리뷰

*아래의 글은 2021년 이효석 문학상 수상작인 <미조의 시대>에 대한 단평입니다. 


<아름다움의 구원>에서 한병철은 '아름다움은 은폐에서 나온다'라고 역설한 바 있다. 제프 쿤스의 강아지상과 같이 모든 것을 숨김없이 노출하는 '매끄러운' 작품은 본질적으로 아름다움에 반한다는 것이다. 나아가 한병철은 인스타그램, 페이스북 같은 SNS나 포르노성의 콘텐츠 등 현대를 특징짓는 미디어 요소들이 아름다움의 설 자리를 없앤다고 보았다. 굳이 아름다움까지 가지 않더라도 현대인, 특히 2008년의 세계 경제 위기 이후의 수축사회 경향의 와중에 코로나 재난까지 맞이한 2021년의 사람들에게 있어 어떤 삶의 여유 공간이랄까, 무언가를 도모할 수 있는 틈새라는 것이 점차 없어져 가고 있는 것은 분명 사실인 것 같다. 문득, 부탄가스가 다 되어 어묵탕이 차게 식고 술자리의 분위기도 깨져버리자 그제야 나와 수영 언니의 눈에 (잠재적 보균자일지 모르는) 주변 손님들이 눈에 들어오게 되었던 장면이 떠오른다. '여기 앉아있어도 되는 걸까'하는 걱정에 나와 수영 언니는 불현듯 자리에서 일어서고, 이에 단둘이 무인도로 떠나서 답답한 현실을 내버리자는 등의 몽상 같은 대화도 중단된다. 여기서 나와 수영 언니의 눈에 갑작스레 들어온 군중(손님들)을 위협적으로 수축해가는 외부사회로, 수영 언니와 내가 자리에서 일어서게 된 일은 그런 수축사회의 시선이 도모의 자리에 불러일으킨 존재론적 불안의 결과라고 생각해본다면 어떨까.


 <미조의 시대>라는 작품에 관해 이야기를 풀어나가기가 쉽지 않다는 느낌이 있다. 이는 나에게 <미조의 시대>가 어떤 새로운 시대적 인간상을 보여주는 작품으로 다가오는데, 그 인간상에 대한 나의 태도 & 입장을 먼저 명확히 해야 할 것 같기 때문이다. 어떤 입장이 없이는 아무런 이야기를 할 수 없다던 테리 이글턴의 말은 사실이었다. 단지 말을 풀어나가는 것 만이 목적이라면, 나가 아닌 수영 언니에 초점을 맞추는 게 훨씬 쉬운 일이 되지 않을까. 그러나 나가 수영 언니에게 "언니는 그런 사람이었구나"라고 말했을 때 거기엔 '언니는 그런(언니의 말대로), 체제에 순응하는 사람이었구나.'라는 표면적 의미의 기저에 '언니는 그런 방식으로 자기 삶과 세계를 규정짓는 사람이구나.'라는 어떤 새삼스러운 깨달음이 깔려있다고 보기에, 그 쉽고 간단한 '규정짓기'라는 작업을 내가 여기서 더 섬세하게 펼쳐나가는 것은 이 소설을 다 읽은 입장에서는 민망한 일일 것 같다.


물론 소설에서 (의도적으로) 암시처럼 던져주는 구조의 단면들이 없는 것은 아니다. 가령 미조가 처음 면접을 보러 갔던 곳의 사장이 보인 고압적인 태도, 그곳에서 말 그대로 디스크 환자가 되어 일을 하는 여성 직원들, 반쯤 사기처럼 매물 사진을 올려놓고 상황 판단을 하기 어려울 정도의 빠른 템포로 일을 일어 붙이는 젊은 부동산 중개인과 보증금 액수의 차이로 인격에 대한 침해와 휴머니즘의 사이를 오가는 전세방의 상태 등. 페미니즘, 자본주의, 인간 소외 등등 수많은 거대한 담론을 떠오르게 하고 자연스레 수영 언니의 말에 동조하지 않기 어려워지도록 만든다. 그리고 그런 마음으로 소설을 읽어내려가다 보면 어떠한 서사적 맺음이나 사유의 전개 없이 끝나는 것만 같은 소설의 마지막 페이지에서 허탈감까지 느끼게 된다.


 그러나 바로 그런 마음 앞에서 나는 이 소설을 다시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다시 살펴봄의 과정에서 인식하게 되어야 하는 것은 다름 아닌 이것이 '개인'에 관한 이야기라는 사실이 아닐까 싶다. 여기서 '개인'이란 기본적으로는 주인공인 나이지만 나아가 폐허 같은 시대 상황 속에 놓인 각각의 '개인들'이기도 할 것이다.


 이 사회에 살아가며 개인들은 온갖 종류의 게임을 벌여야 한다. 커리어를 쌓는 게임, 돈을 버는 게임, 사회적 환경 속에서 매 순간 벌어지는 협상 등등. 사회에서의 게임은 항상 사회적 관계 속에서 발생한다. 그런데 한편으로 사람에게는 뭐랄까, 6평 단칸방에 무용하게 공간을 차지하며 줄기를 뻗는, 그런 모습도 있는 게 아닐까 생각한다. 소위 말해 '그냥 사는 것' 말이다. 목적 없이 버스의 종점까지 다녀오면서 바다 여행이라도 다녀온 듯한 기분을 느끼고, 굳이 시라고 하지 않아도 되는 어떤 글들을 노트북에 적어보고, 특별히 대박 웹툰을 만들겠다는 야망 없이도 그림을 잘 그린다든지, 취직은 생각도 없이 맛집 탐방을 다니며 공장 외벽의 어떤 각도에 대해 피상적으로 힙(hip)함을 느끼는 등등의 모습들 말이다. 이에 굳이 '감각적 삶'이라는 이름을 붙일 수도 있겠다.


 그러나 수축사회는 이런 고구마 줄기들이 어디까지나 '무용'한 것이라는 사실을 끊임없이 인식하게 만든다. 방이 점점 좁아지니 자리를 차지하는 고구마 줄기를 그냥 놔둘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수축사회가 불러일으키는 존재론적 위협의 또 다른 결과는 사회적 게임의 난이도와 밀도의 거듭된 상승이다. 이에 대해 우리는 세 가지의 전략적 태도를 취할 수 있다. 첫째는, 누워버리는 것이다. 게임의 빠른 템포와, 내가 무엇을 상대로 게임을 하는지, 어떻게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는 상황의 두려움, 압도감으로부터 등을 돌려버리고 게임 플레이를 거부하는 것이다. 그 누운 자리에서 우리는 감각적 삶을 다시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 게임 플레이를 거부한 대가로 주어진 아주 작은 자기만의 영역 안에서 일지라도 말이다.


 두 번째 가능한 태도는, 감각 혹은 고구마 줄기를 그대로 가지고서 사회적 게임 속에 자신을 완전히 내던지는 일이다. 이렇게 살아가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지만, 그렇다고 불가능하지는 않다. 다만 한 가지 조건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동지와 동지의식의 뒷받침이다. 자신과 비슷한 입장에 놓여있던 과거의 사람과 시간적으로 동지의식을 느낀다든지, 마음을 놓아도 괜찮겠다 싶은 사람의 방에 가서 누워버림으로써 공간적 동지의식을 구축한다든지 하는 식이다. 이러한 동지의식은 무척 강력한 힘이어서, 내 삶의 모든 대타자를 포기하고 동지와 외딴 섬에 들어가 고립된 채 살아도 좋겠다는 생각까지 갖게 한다. 고구마 줄기가 잡혀서 전면적인 착취의 대상이 된다는 점만 제외하면 이런 삶도 충분히 가능한 선택지일 것이다.


 그런데 위의 두 삶이 멋지다는 것과는 별개로, 내 양심의 손을 얹고 이 시대를 살아가는 '개인'에게 권할만한 삶의 양식이냐 묻는다면 그에 대해선 대답이 궁색하다. 사실, 이런 방식들은 수축사회의 거시적 여건을 인정하지 않으려 함으로서 (혹은 '완전히 수용하겠다' 말하는 아주 복잡한 방식으로 인정하지 않음으로써) 정신적 시야나 신체적 건강 따위의 중요한 것들을 잃어가는 과정인 것은 아닐까? 만일 이것이 사실이라면, 어떤 대안을 이야기할 수 있을까.


 그 대안이자 앞서 말한 가능한 태도의 세 번째는, 고구마 줄기를 잘라내고 자신을 보존하는 것이다. 이는 게임에서 등을 돌리지 않으며 적어도 '지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태도다. 전세방을 구하는 게임에서 등을 돌리고 눕거나 게임에서 져 버린다고 해서 당장 죽는 것은 아니리라. 그러나 (유능한 부동산 중개업자의 템포에 끌려다니느라) 실감조차 하지 못하는 새 새로이 내 주변 환경을 구성하게 된 어두운 골목길, 머리를 내밀면 행인들의 발에 채일듯한 창문, 그 사이를 타고 넘어오는 감자조림 냄새 등의 대타자는 서서히 돌이킬 수 없는 방식으로 나의 정신을 재구축해나갈 것이다. 또 공상과 같은 동지애가 우리의 현실을 잊게 만드는 마취제의 역할을 해줄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러는 사이 우리의 현실은 유한한 자원인 우리의 신체를 자비 없이 소진시킬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금 다만 보존에 급급한 것이 아니라, 보존에 집중해야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의 정신과 신체에 대한 타자의 영향에 민감해져야 하는지 모른다. 이는 희망이 보이지 않는 현재에 대한 암울한 이야기 일수 있지만, 더는 희망이 인간의 노력으로 만들어지지 않는 시대에, 혹은 희망은 인간의 노력으로 만들어지지 않음을 잘 알게 된 시대에, 이는 절박한 요구인 동시에 훗날 있을지 모르는 엔트로피의 역전을 위해 자유의 씨앗을 남기는 일인지도 모른다. 소설 후반부의 고구마 줄기가 잘려 나간 모습에서 상실감 보다 희망의 느낌을 더 보게 되었던 이유는 이것이 아닐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