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나 바우쉬, 사랑의 이름으로 불리는 불쾌의 쾌, 그 모순된 아름다움
꽃밭은 무대라기보다
어느 시대의 무의식이 펼쳐진 장원 같았다.
아름다운 생명력 위로, 동시대의 억압이 스멀거리며
몸으로 그림자를 드리우는 공간.
꽃 사이로 뛰던 한 사람은
아이 같고, 짐승 같고, 인간 같았다.
성별도 나이도 국적도 사라진 존재.
“여권 주세요.
여권 주세요.
여권 주세요.”
반복되는 문장은
낮은 울음처럼, 혹은 규율처럼
상대를 무기력하게 만들고,
관계라는 이름의 사슬을 조용히 조여왔다.
쫓기고, 훈육당하고, 울고 웃고 춤추는 몸들.
명령에 따라 앵무새가 되고, 목마가 되고, 장난감이 되는 순간들.
부자 관계처럼 보이는 퍼포먼스는
폭력과 애정이 같은 테이블에서 교환되는
지금 시대의 은유 같았다.
서로의 뺨을 때리고,
그 자리 위에 입을 맞추는 행위.
‘사랑’이라 부르는 많은 것들이
얼마나 자주 길들임에서 시작되는지
꽃밭 한복판에서 드러나고 있었다.
무용수들은 무대 위에서
차별, 통제, 보호, 혼란, 폭력을
요정 같은 몸짓, 분수대처럼 튀는 리듬,
경쾌한 음악으로 별사탕처럼 쪼개 보여주었다.
질서와 무질서가 겹겹이 포개져
묘하게 균형을 이루는 군무.
그 상징적 서사와 달리,
꽃과 음악과 배우들은 기이하게 사랑스러웠고
나도 모르게 움칫, 둠칫—
내 골반이 저절로 반응했다�
절제된 언어로 번역된 언캐니한 감정들은
이상하게도 너무 아름다웠다.
아마 ‘꽃밭’이라는 울타리가
폭력을 춤으로, 비극을 색채로,
절규를 리듬으로 번역해 건네는
일종의 완충지대였을 것이다.
연극 안에서 흐르던
경쾌한 리듬 속 억압의 코드는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속
‘소마’ 약을 떠올리게 했다.
감시 아래 계급화된 사회.
늙지도, 아프지도, 죽지도 않고,
책임도 죄책감도 희미한 세계.
불편은 약 한 알에 증발하고
불쾌는 ’쾌‘의 감미료로 감춰진다.
그곳에서 “창작의 기쁨”은 지워지고
“순응의 즐거움”만 허락된다.
예술의 영혼이 소마화되는 최종 단계처럼.
탄츠테아터.
전통적 움직임을 연극적 언어로 번역하고,
깊음과 가벼움의 경계를 우아하게 흔들어낸 사랑혁명.
피나 바우쉬가 그 시대에 이 감각을 피워냈다는 사실만으로도,
경이롭다.
꽃밭 위의 연대는
세대, 성별, 정체성을 모두 넘어
하나의 작은 행성처럼 공존하고 있었다.
폭력과 해방, 억압과 아름다움이
한 장면 안에서 달처럼 뜨고 지는 풍경.
짓밟히면서도 피고,
무너지면서도 춤추고,
어둠 속에서도 서로를 끌어안는 것—
어쩌면 인류가 버텨온 방식인지도 모른다.
다양성을 하나의 호흡으로 묶어내는
이 묘한 모순의 힘.
유쾌함과 고독, 가벼움과 무거움이
정교한 다성부(多聲部)처럼 동시에 울렸다.
카네이션 무대가 다시 떠오른다.
검은 양복들이 철조망을 오르내리며
보이지 않는 구조를 흔들던 장면.
한 여자는 비명을 질렀고
다른 이들은 묵묵히 ‘일’을 했다.
그 조형은
이 시대의 불안이 어떤 모양으로 움직이고 숨 쉬는지를
그대로 비추는 듯했다.
마지막 씬.
무용수들이 서툰 한국어로
춤을 추기 시작한 이유를
나직이 고백하던 순간—
꿈을 이룬 자들이 다시 초심을 말하는 그 장면이
내 안에서 오래 흔들렸다.
막이 내리고
손에는 무대에서 살아남은 카네이션 한 송이를 쥐고 있었다.
그 작은 꽃의 생명력과 온기가
내 발걸음을 공연장 밖으로 이끌었다.
노을 진 공기 아래에서
그 여운을 잃기 싫어 오래 걸었다.
25/1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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