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의 용도 / 아니 에르노 (Annie Ernaux)
사진은 시간의 바다 위에 떠있는 저마다의 섬이다. 한 장의 사진은 순간을 영원으로 가둔다.
- 김화영 / 바람으로 지은 집
어느 날 아침 잠에서 깬 A (아니 에르노)는 바닥 타일 위에 어지럽게 흩어져 있는 속옷과 스타킹, 하이힐을 바라 본다. 그것들은 명백히 전날 밤 M (마크 마리)과 나눈 ‘사랑’의 흔적들이다. A는 갑자기 ‘욕망과 우연이 낳은, 하지만 결국 사라져 버릴 이 배열'에 고통과 아름다움을 느낀다. A는 카메라를 꺼내 셔터를 누르기 시작한다.
A와 M은 이렇게 찍은 14장의 사진에 형태를 부여하고 싶어 했고, 사전에 서로에게 보여주지 않은 채 자유롭게 각자 글을 썼다. 2003년 3월부터 2004년 1월까지 두 사람의 사랑의 흔적을 담은 책 '사진의 용도'는 이렇게 만들어 졌다.
책 표지를 넘기면 조르주 바타유의 저 유명한 문장이 첫눈에 들어온다. '에로티즘은 죽음 속까지 파고드는 삶이다’. 사실 이후의 모든 텍스트는 이 아포리즘의 사적인 변주 혹은 사족이다.
M을 만났을 당시, A는 유방암 치료 중이었다. 그들은 그 10개월 남짓한 기간 동안 죽음과 같이 살았다. A는 죽음에 한 걸음 더 근접함으로써 삶의 매 순간에 더 밀착했고, M은 연인의 투병을 통해서 죽음의 여러 순간들을 체험했다.
A는 말한다. ‘나는 나의 죽음을 보았다. 그러나 나의 부재를 생각하는 것은 다르다. 나는 시간 안에 있는 육체다. 나는 기다리는 어떤 것도 생각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더 이상의 기다림은 없다’
무엇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그 상황, 그 시간 속에서 그들은 무엇을 할 수 있었을까? 그들은 끝없이 서로의 육체를 탐하고 그 흔적을 사진으로 남긴다.
욕망은 필연적으로 깊은 공허를 낳지만, 새로운 욕망은 가속이 붙은 채 서로를 향해 끝없이 질주했을 것이다. 다리가 뒤집어진 바지, 혼자 말려있는 팬티, 반쯤 풀려 있는 신발 끈들...그 순간에 그들의 삶과 죽음은 동일한 것이었다. 14장의 흑백 사진들 속 흐트러진 오브제는 그들이 공유했던 처연한 에로티즘을 목격하고 있다.
A와 M도 이미 알고 있다. 결국 언젠가 그들은 더 이상 서로의 '구두를 섞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그 순간에만 허락된 다시 만나지 못할 각자의 뒷모습을 찍는 것이다.
찰칵! 사진으로 찍힌 순간, 피사체는 정지된 채 영원 속에 갇힌다. 그러나 한번 더 그 사진을 들여다 보라. 그 영원 이란 것 또한 얼마나 많이 죽음의 얼굴과 닮아 있는가.
책을 읽는 도중 자주 뒤라스가 떠올랐다. 가볍고 우아하지만 돌연 맥락이 사라지고, 어둡고 서정적이지만 갑자기 분출하는 정염의 문장들. 아니 에르노는 2008년 자전적 소설 '세월'로 뒤라스 상을 수상했다.
앙리 브레송은 자신의 사진을 '결정적 순간'이라고 표현한다. 그러나 어디 사진 뿐이겠는가. 카메라에 포착되지 않더라도 현재는 반복되지 않는 일회성의 견고한 고독, 살아 있는 모든 순간은 '결정적 순간'이 아닌가.
P.S : 신유진의 번역과 후기는 개인적으로 최고란 생각. 두 개 따옴표 속 문장은 아니 에르노의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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