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NJ Dec 13. 2019

짜장면의 아우라

짜장면만큼 구설이 분분한 음식도 흔치 않다. 이름을 되찾긴 했지만, 8-9년 전까지도 짜장면 대신에 자장면이라는 무언가 덜떨어진 듯한 단어를 써야만 했다. 당시에 시인 안도현이 단단히 화가 나서 짜장면을 자장면으로 결코 쓰지 않겠노라고 '선언'까지 했던 기억이 난다.

짬뽕은 운이 좋은 편이다. 똑같은 '짜' 자 출신인데  짜장면만 시범 케이스에 걸려 혼이 났다. 아마도 짜장면이 이 바닥의 대표주자이기 때문일 것이다.

중국집에서의 고전적 딜레마, 즉 짜장과 짬뽕 중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은 세월이 흘러도 여전하다. 그 고민을 덜기 위해 누군가 기특하게 짬짜면이란 걸 식탁에 올려놓았지만 적어도 내게 그것은 해결책이 아니었다.

내가 원하는 것은 오이채가 면 위에 반듯하게 놓여 있고 가운데에 메추리알 하나가 앙증맞게 박혀있는, 온전한 한 그릇의 짜장이다. 무엇보다 짬짜면은 짜장면과 달리 '가오'가  느껴지지 않는다.

사실 나는 짜장과 짬뽕 사이, 선택의 딜레마를 겪은 적이 별로 없다. 나의 허기는 매우 구체적이어서 '오늘 짜장이 땡기네' 중얼거리며 중국집을 찾는 식이다. 물론 소주가 생각날 때 최고의 술국인 짬뽕을 먹는다.
 
나의 고민은 그것보다는 '보통'과 '곱빼기' 사이에 있다. 그 고민은 사소해 보이지만 반복적이어서 자주 성가시다. 그 '정량'과 무게는 잘 모르지만 '보통'은 다 먹은 담에 뭔가 조금 아쉽고, 곱빼기는 좀 많아 부담스럽다.

주로 혼밥을 하는 내게 있어 이 선택은 녹녹지 않다. 그렇다고 별도의 가격으로 내게 양을 맞춘 특별한 짜장면을 요구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얼마 전 짜장면이 포탈에 떴길래 또 뭔 일인가 싶었더니 시집의 가격 인상과 관련된 내용이다. 시집 한 권 가격이 2천 원이나 올라 결국 짜장면 두 그릇 값과 같아졌다는 기사다.

늘 이런 식이다. 이런저런 이유로 짜장면은 자주 세간의 주목을 받지만  친구라고 할 수 있는 짬뽕은 언제나 그렇듯 중요할 때 자리를 비우거나 쓸쩍 묻어간다.

여하튼, 예기치 않은 또 하나 선택의 딜레마가 생겼다. 물론 짜장면도 먹고 좋아하는 시집도 살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 매월 소소한 '정량'의 용돈으로 근근이 버티고 있는 내게 그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럼에도 짜장면을 찾을 수밖에 없는 이유는 아마도 그 대체할 수 없는 존재감에 있지 않나 싶다. 짜장면이 먹고 싶은데 대신에 김치찌개나 햄버거를 떠올린다는 것은 상상하기 쉽지 않다.

짜장면은 오래전 우리가 무언가를 기억하기 시작했을 때부터 한결 같이 우리 곁에 있어 왔다. 그래서 그런지 그것에겐 평생 궂은일 마다하지 않고 묵묵히 선산을 지킨 장자의 아우라가 느껴진다.

이삿날 짐을 풀다가 신문지 위에 대충 올려놓고 후루룩 먹던 짜장면. 졸업식날 식구들 모두모여 허겁지겁, 쭈르륵 쩝쩝 맛있게도 해치웠던 짜장면. 당구장에서 손가락에 초크를 묻힌 채 대충 허기를 때웠던 퉁퉁 불은 짜장면.
친구한테 바람 맞고 집에 오는 길에 혼자 먹었던 외로운 짜장면.

무엇보다 어머니는 짜장면이 싫다고 하셨던가.
짜장면은 은근히 힘이 세다.

작가의 이전글 암브로시아 혹은 신의 음식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