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가정상비약 이래야 빨간약 하나가 전부였다. 피부에 상처가 날 때마다 어머니는 그것을 솜으로 묻혀서 다친 부위에 조심조심 발라주셨다. 호호 입김은 왜 부셨는지. 그것만 바르면, 빠르기도 해라, 벌써 다 나은 것 같은 느낌마저 들었다.
아까징끼는 아니었지만 이와 비슷한 유사 만병통치약을 군대에서 경험한 적이 있다. 생김새야 평범한 보통 알약과 별 차이가 없는데 그 처방 범위는 아까징끼 못지않았다. 내과 버전의 아까징끼 랄까? 소화불량, 감기몸살은 물론 치통에도 늘 같은 약, 그 아이보리 색 알약이 제공되었다. 약을 들고나가는 내 뒤통수에 대고 선임 위생병이 소리친다. 삼일 내에 꼭 낫도록. 이건 명령이얏!
긴 세월이 지나 이미 사어가 된 '아까징끼'를 다시 세상에 소환한 사람은 국회위원 L 이었다. 지난 총선 선거운동 기간 막판에 그는 현 검찰총장을 지키겠다는 결연한 의지의 표현으로 혈서를 쓰기로 했다. 당선만 될 수 있다면 무엇을 못하겠는가. 나름 고심한 회심의 한 수였다. 그런데 이벤트 초반부터 뭔가 석연치 못한 장면이 목격되었고 현장의 기자들이 질문하기 시작했다.
보좌관의 해명이 재미있다. 원래 '○○○ 사수' 라는 다섯 음절을 쓰기로 했는데, 그만 피가 모자라 이름 세 번째 글자부터 색깔이 비슷한 '아까징끼' 로 '대체'했다는 것이다. 처음 그 기사를 읽고 피식 웃음이 나왔지만 그럴 수 있겠다 싶었다.
사실 스스로 손가락을 깨문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가. 약지를 깨물어 흐르는 피를 와병 중인 아버지의 입에 흘려 넣었다는 전설의 효자쯤은 돼야 가능한 행위가 아니던가. 한 번도 시도해 본 적은 없으나 가히 그 통증은 미루어 짐작할 만하다. 어차피 정치적 결의를 상징적으로 드러내기 위한 행위이므로 그럴 수도 있으리라. 플랜 B까지 염두에 둔 캠프의 꼼꼼한 기획력에 내심 칭찬을 해주고 싶은 마음까지 들었다.
문제는 엉뚱한 곳에서 튀어나왔다. L 씨의 혈서 퍼포먼스를 지켜본 여러 기자들이 보좌관이 해명한 첫 두음절의 혈서까지도 아까징끼를 사용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품은 것이다.
L 씨 보좌관은 펄쩍 뛰며 증거 자료를 보내주겠다고 철석같이 약속을 했으나 끝내 그것은 공개되지 않았다. 어렵게 보좌관과 통화한 한 기자는 '이제 그 문제를 다시 거론하고 싶지 않다'는 최후통첩 만을 받아야만 했다. 이로써 혈서인지 아닌지는 결국 알 수 없게 되었다. 사실 이 대목에서 굳이 진실 여부를 알고 싶은 마음 또한 없다. 진실 운운하는 것 자체가 진실이라는 단어 자체에 대한 모욕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낙선한 그를 이전처럼 자주 보지는 못하리라. 그 또한 지금처럼 집요하게 기자들의 추적을 당할 일도 아마 없을 것이다. 낙선으로 마음의 상처를 입은 그에게 호호 입김까지 불어가며 아까징끼를 발라주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다. 단지 불현듯 이유 없이 그가 가끔은 생각날 것 같다.
국회 상임위에서 '겐세이'나 '야지'를 놓지 말라고 동료의원에게 호통치던 그를,
업무보고 차 국회에 출석한 공무원들의 답변을 가로채며 기승전 '사퇴하세욧'을 줄기차게 외치던 그를,
MS 오피스를 왜 마이크로소프트에서 구매하느냐고 교육감에게 버럭 핏대를 올리던 그를
기억에서 지우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빨간색이라면 모든 것이 통했던 만병통치약은 이제 잘 듣지 않는다. 그 기나긴 야만의 시대를 우리 모두 진작에 통과했다는 것을 그는 알까. 왠지 그가 안쓰럽게 느껴지는 봄날이다. 창 밖의 세상은 이미 햇살 가득한 계절, 눈부신 사월인 것을..
#아까징끼
#아까징끼의추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