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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J Jul 17. 2020

1984

1984

백남준의 비디오 아트가 1984년 새해 첫날을 열었다. 인공위성을 통해 세계 주요 국가로 생중계된 ‘굿모닝 미스터 오웰’은 환상적이었다. 조지 오웰이 예언한 암울한 미래의 모습은 도래하지 않았다. 세상은 이 얼마나 유쾌하고 멋지고 재미있는 곳인가. 우리는 TV를 보면서 내내 행복했다. 프로그램 종료 후 이어진 뉴스의 첫 꼭지는 전두환 대통령의 신년사였고 주제는 ‘평화와 번영’이었다.

2월 영국 국영동물연구소는 양과 염소의 태아발생세포를 조합해 두 동물의 특성을 공유한 신종 동물을 ‘창조’했다고 밝혔다. 소련에서는 안드로포프 서기장이 죽고, 이어 체르넨코가 새로운 서기장으로 취임했다. 베일에 싸인 소련의 최고 권력 승계과정을 지칭하는 용어인 ‘크렘린 놀로지’ (Kremlinology)가 자주 언론에 오르내렸다.
3월에는 '팀 스피릿' 훈련 중이던 미군 항모 키티호크호가 한반도 동해상에서 소련군 핵잠수함과 충돌했다. 경북 포항 부근에서도 미 해병대 헬기가 추락해 탑승객 29명 전원이 현장에서 사망했다. 한미 군사 훈련기간 내내 북한은 전군 동원태세령을 유지했다.

4월 안기부는 최은희, 신상옥 부부가 1978년 홍콩에서 납치되어 현재 북한에 머물고 있다고 공식 발표했다. 권이혁 문교부장관은 1980년 이후 이른바 ‘녹화사업’이라는 이름으로 강제 징집된 대학생 수가 465명이라고 밝혔다.

5월에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방한했다. 한국에 도착하자마자 그는 오체투지 하여 김포공항의 맨 땅에 입을 맞췄다. 생전 처음 보는 교황의 친구(親口) 의식이었다. 그는 여의도 광장에 수만 명의 성도를 모아놓고 한반도의 평화를 위한 미사를 집전했다.

7월 하순부터 8월 중순까지 LA에서 32회 하계 올림픽이 개최됐다. 반쪽 올림픽이었다. 소련을 비롯한 동구권 대부분의 공산진영이 대회를 보이콧했다. 소련과 적대관계에 있던 중국은 1952년 이후 처음으로 ‘차이나’라는 국명으로 참가했고, 대만은 ‘차이니스 타이페이’라는 국호를 사용하는 굴욕을 감내했다.

LA 올림픽 주경기장에서 열린 개막식 장면은 인상적이었다. 수백 대의 그랜드 피아노가 동시에 연주하는 조지 거쉰 (George Gershwin)의 '랩소디 인 블루'는 특히 장관이었다.

9월 초에 망원동 전체가 물에 잠겼다. 330㎜가 넘는 집중호우에 망원동 배수지 펌프장 수문이 붕괴돼 수만 가구가 침수됐다. 망원동 12,000명 주민들은 서울시와 건설사의 시공, 관리 소홀에 책임을 물어 소송을 제기했다. 북한 적십자사는 남한 측에 수해물자 제공을 제의했고 남측 정부는 이를 수용했다. 사상 처음으로 북한의 구호물자가 남한으로 넘어왔다.

9월 초부터 서울지역 대학생들이 전두환의 방일 (訪日)에 반대하는 대규모 가두시위를 벌였다. 청량리 경찰서에 연행된 경희대 여학생 3명이 경찰들에게 성추행을 당했다고 폭로, ‘청량리경찰서 성추행 사건’의 시발이 됐다. 일본에서 최초의 한일 정상회담이 개최됐다. 나카소네 일본 총리는 ‘과거의 한일 양국 간의 관계에 대해 "유감"을 표명’했다.

10월 들어 학원과 노동계의 반정부 투쟁이 본격화된다. 대학생, 시민, 청계피복 노조원 등 1,700여 명이 노동법 개정과 청피 노조 인정 등을 요구하며 가두시위를 벌였다. 서울시내 대학생 1천여 명이 '민주화 투쟁 실천대회'를 개최했다. 대우 어패럴 노조원들이 서울 여의도 노총회관을 점거해 농성을 벌였다. 서울대 학생들의 중간고사 거부 투쟁이 이어지자 마침내 경찰은 전경 병력 6천여 명을 투입해 학내에 상주시켰다. 학교 측은 일체의 학생 자치활동을 금지했다.

서울시경은 ‘서울대 프락치 사건’을 주동한 서울대생 유시민을 구속하고 백태웅 등 8명에 대해 수배령을 내렸다. 이해구  치안본부장은 학원사태 관련 특별담화를 발표했고, 곧이어 보안사는 재일 모국 유학생 6명을 간첩 혐의로 구속했다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며칠 후 민주화운동의 구심점인 '민주통일국민회의‘'가 결성됐다.

11월 미국 레이건이 재선에 성공했다. 서울 동작대교가 개통되었고 예술의 전당 기공식이 열렸다. 대학생 260여 명이 민정당 중앙당사를 점거하여 농성을 벌였다. 서울시경은 경찰의 여대생 성추행 사건은 '낭설'이라는 내용의 기자회견을 열었고 곧이어 각계 시민단체가 참여한 '성추행 사건 대책협의회'가 결성된다. 정부는 국제노동기구 (ILO) 가입을 보류한다고 밝혔다.

12월, 미국에 망명 중이었던 김대중은 다음 해 1월 중에 귀국하겠다고 선언했다. 노동부는 10인 이상 업체에 대해 최저임금을 월 10만 원 이상으로 의무화할 것을 결정했다. 영국에서 광우병으로 의심되는 소 133마리가 최초로 발견되었다. 시인 김종삼이 타계했다. 영화 '택시운전사'의 실존 인물인 김사복도 운명했다.

1984년 최고 유행어는 김병조의 ’ 지구를 떠나거라~‘였다. 우리는 의례히 수업을 빼먹고 당구를 치거나 학교 인근 술집을 전전하며 한 해를 보냈다. 주로 파전에 깍두기 안주를 곁들여 막걸리나 소주를 마셨고, 간혹 여학생을 만나면 호프집 ‘주노’에서 500cc에 500원 하던 값비싼 생맥주를 마셨다. 다들 눈부신 청춘이었으나 대부분 행복하지 않았다.

술을 마시다가 누군가 노래를 시작하면 곧 합창으로 이어졌고, 그러다가 심심해지면 누군가 김병조의 어투를 빌어 ‘지구를 떠나거라~’를 반복했다. 또 다른 누구는 헤어진 여친이 보고 싶다며 공중전화 박스로 달려갔다. 누구는 술상에 엎드려 훌쩍였고 누구는 그 와중에 시를 끄적였다.

술집의 사방 벽면은 여러 가지 낙서와 그림으로 뒤덮여 있었다. 내용은 정치적인 구호와 격문이 대부분이었으나, 간혹 보들레르의 시와 서툰 사랑의 고백도 눈에 띄었다. 그해 성탄절 전야, 친구들과 술을 마시다가 본 낙서는 처음 보는 것이었다. '세상의 아들아 내 손이 비었구나. 너희에게 줄 게 아무것도 없구나'


#19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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