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07. 05
나는 소심하고, 강박증이 심한 어린이였어, 지금은 훨씬 나아졌지만. 초등학생 때는 사인펜이나 색종이 같이 챙겨가야 하는 준비물이 늘 많았던 것 기억나? 난 혹시나 준비물을 챙기지 못했을까 봐 전날 밤 가방을 몇 번씩 확인했고 심할 때는 준비물을 가져가지 못해서 혼나는 꿈을 꾸기도 했어. 학원에 다닐 때면 셔틀버스를 놓치는 꿈, 고등학생이 되고는 모의고사를 망치는 꿈 등 내 걱정거리는 늘 꿈으로 나타나서 날 괴롭혔지. 다행히 중고등학교를 거쳐 대학생이 되는 과정에서 강박에 시달리는 정도가 줄기는 했어. 아직 가끔 아르바이트에 지각하거나 실수를 해서 혼나는 꿈을 꾸기도 하지만!
네가 어린 시절 이야기를 하니 가장 먼저 생각나는 건 아쉽게도 강박이 날 지배했던 모습이네. 전혀 행복했던 추억이 아닌 점은 유감이야... 대신! 내가 어릴 때 좋아했던 것들에 대해 생각나는 대로 말해볼게. 나는 지금과 달리 겨울을 좋아했어. 여름은 덥고 끈적거리는 게 참을 수 없이 싫었지. 몸에 열이 많은 편이거든. 겨울에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날인 크리스마스와 내 생일이 있어서 특히 좋아했던 것 같아. 음... 그리고 지금과 똑같은 건 그때도 빵을 좋아했어! 우리 엄마가 운영하는 가게는 양쪽의 빵집 사이에 위치했거든? 어릴 때부터 여러 종류의 빵을 구경하고 먹어봤지. 그게 이유라고 명확하게 말할 수는 없지만 한때 제빵사를 꿈꾸기도 했어. 예쁘고 맛있는 디저트를 만드는 사람이 된다면 어떨까 자주 상상했었지.
주말이 되면 엄마가 사다 놓은 빵을 골라 먹으면서 TV를 보곤 했어. 너도 알다시피 게임에 영 흥미가 없는 나는 어릴 때부터 드라마, 예능, 또 어린이답게 애니메이션 보기를 좋아했어. 다양한 애니메이션을 보고 즐겼는데, 가장 좋아했던 건 늘 일상물 혹은 학교물이었어. 학교를 배경으로 하여 일상적인 사건들이 스토리로 짜여있는 애니메이션들. 제목을 언급하면 내 또래 친구들이 다 알만한 수많은 학교물 애니메이션을 보고 또 봤지. 반대로 판타지 장르의 애니메이션은 별로 좋아하지 않았어. 어떤 특이하고도 엉뚱한 세계관이 있는 장르의 것들 말이야.
바로 '해리포터'와 같은 것들! 고백하자면 나는 24살 이전까지 해리포터를 단 한 편도 본 적이 없었어. 대충 마법 세계에서 살아가는 마법사에 대한 이야기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위에서 말했듯이 나는 잔잔하게 흘러가는 일상적인 플롯의 콘텐츠를 보면서 힐링하는 어린이, 그리고 청소년이었어. 그래서 판타지 장르의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해리포터는 아무리 재미있다 하더라도 적어도 나에게 매력적인 콘텐츠가 아니었어. 그래서 그 유명한 'Dobby is free' 짤의 도비가 청소하는 집 요정 캐릭터라는 것 빼고는 알고 있는 정보가 전~혀 없었어.
그런 내가 우연히 팟캐스트 '책읽아웃'을 정주행 하다가 해리포터 20주년 특집 편을 듣게 된 거야. 퇴근하는 버스 안에서 해리포터 내용 자체를 모르니까 대충 흘려들으며 졸고 있었는데, 세 분이 너무 재미있게 대화를 나누는 거야. 그 어떤 편보다도 그저 천진하게 신이 난 어린이들같이 느껴졌달까. 그냥 단순한 호기심이 생겼어. 나도 해리포터를 알고서 이 신나는 대화에 끼어들고 싶다! 그런 마음이 들더라고. 그래서 남자 친구에게 “나 해리포터를 정주행 할 거야” 하고 말했지. 뒷북도 이런 뒷북이 없지? 사실 이때까지도 별 기대는 없었어.
일단 오늘 시점에서 해리포터 시즌 5인 불사조 기사단 편까지 봤어. 결론부터 말하자면 시즌 1, 시즌 2를 보면서도 별 감흥 없던 내가 어느 순간 해리포터의 매력에 빠져들었어. 그것도 단단히. 보통 한 주에 한두 편씩 정주행을 하는 중인데, 이번 주는 평일 내내 빨리 주말이 되어서 남자 친구와 해리포터를 보고 싶다는 마음 하나로 일했던 것 같아. 금요일에 보기로 약속하고는 참기가 힘들어서 목요일에는 해리포터 오프닝 음악을 들으면서 출근했다니까? 올해 핼러윈 시즌에는 해리포터 코스프레를 해보고 싶다는 생각도 들고, ‘다시 런던에 간다면 꼭 해리포터 스튜디오에 가야지’ 다짐도 하고 말이야.
어릴 때부터 쭉 일상물만 좋아하던 내가 갑자기 왜 해리포터에 빠져든 걸까, 곰곰이 생각해봤어. 뭐 해리포터가 명작인 탓도 있겠지. 그런데 내가 생각하기엔 해리포터를 보거나 생각하는 순간만큼은 나도 지루하게 반복되는 현실에서 벗어나 마치 마법 세계의 일원이 되는 기분이 들어서 그런 것 같아. 일상이 너무나도 똑같이 반복되는 데다가 남자 친구와도 안정적인 연애를 하고 있고, 만나는 친구들만 만나잖아. 그러다 보니까 내 인생에는 큰 사건이 일어날 리가 없지. 물론 내가 그런 삶을 추구하지도 않고. 하지만 나도 가끔은 단조로운 일상이 심심하게 느껴질 때가 있잖니? 게다가 앞으로는 더욱더 단조로운 인생이 날 기다릴 테고... 해리포터가 내 삶의 그런 갈증을 해소해 주는 것 같아.
다음 편에서는 해리에게 어떤 사건 사고가 기다리고 있을까, 해리와 친구들은 어떻게 난관을 헤쳐 나갈까 궁금하고 기대돼. 해리의 삶을 보고 있자면 대단하면서도 안타깝게 느껴지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내가 어릴 때부터 해온 준비물, 지각에 대한 걱정 따위는 해리에 비하면 얼마나 가벼운 사건인가 싶기도 해. 해리포터에 헤르미온느와 맥고나걸 교수님과 같은 여성 캐릭터가 등장한다는 점도 너무 마음에 들고. 책읽아웃을 듣고 한 번 보기나 해봐? 하고 시작한 해리포터가 이렇게까지 내 덕심을 흔들어 놓을 줄은 몰랐어. 해리포터에 빠진 이유에 대해 설명하자면 끝도 없을 테니 이쯤에서 그만할게 하하... 내일부터 다시 출근할 생각을 하니 빨리 시간이 흘러서 다음 주말, 마법 세계 호그와트 학교로 도망가고 싶다! 7월이 어서 지나가서 퇴사 도비가 되고 싶기도 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