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데렐라병'에 걸린 녹마 [녹마]

2020. 07. 08

by 잠긴 생각들


사람들이 해리포터 재밌다 재밌다 하는데, 나는 아직 한두 개의 시리즈밖에 보지 못했어. 네가 해리포터 덕질을 시작한 걸 보니까, 우리 팟캐스트 클립 중 하나인 '좋아한다고 왜 말을 못 해'에서 그 얘길 하지 못한 게 진짜 아쉽다. 나름 베스트 클립으로 꼽히는 것 중 하나잖아, 그 클립.


나도 한 일주일 전부터 다시 방탄소년단 덕질에 시동을 걸고 있어. 내가 2018년부터 2019년까지 줄기차게 좋아했던 아이돌 그룹. 내 생애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미친 듯이 덕질했던 그룹. 그 시기의 앨범에는 방탄소년단 멤버의 사진들로 점철이 돼있지. 한참을 쉬던 덕질을 다시 시작하면서 그때 열광하며 봤던 영상들을 다시 보니까, 그 감동이 재현되더라. 가슴 졸이며 영상이 업로드되길 기다렸다가 몇십 번 돌려보고, 트위터나 유튜브의 실시간 반응을 확인하고. 그런 것들이 그때는 좀 창피하기도 했는데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랬던 내가 귀엽게 느껴지기도 해.




이번 주 월요일엔 거의 반년만에 이비인후과에 다녀왔어. 내가 원래 편도선이 남들보다 크고 염증이 잘 나는 개복치라는 거 알고 있지? 정말 오랜만에 편도염이 다시 도졌더라고. 월요일 아침이었어. 눈을 뜨자마자 편도선과 귀 안쪽이 아프더라고. 편도가 붓고 염증이 생기면 귀 쪽도 아프거든. 설마, 하고 거울로 편도를 확인하니 하얀 염증이 번지고 있었어. 그날은 애인과 뷔페를 가기로 한 날이었는데 고민이 되기 시작했지. 온몸의 근육이 아프고 미열도 있는 것 같았어. 이대로 뒀다간 상태가 더 심각해질 것 같아서 결국 이비인후과로 향했어.

문을 열고 들어간 병원의 풍경은 좀 충격이었어.

원래 내 고향에는 '제대로 된' 병원이 몇 없어서, 그 이비인후과가 항상 문전성시였거든. 기본 한 시간 대기를 예상하고 가야 하는 곳이지. 그런데 이번에 방문한 그곳엔 환자가 단 한 명도 없었어. 당황스러웠어. 조금도 대기하지 않고 곧바로 체온을 쟀어. [37.8도] 코로나 바이러스에 감염될까 봐 사람들이 병원에 잘 안 오는 것일까, 싶었어. 진료실에 들어가자마자 내 땡땡 부은 편도를 본 의사 선생님이 '아이고~ 많이도 부었네'라고 하셨지. 염증을 떼어내고, 콧물을 빼고, 콧속을 소독하고······. 익숙한 루트였어. 이틀 치 약을 처방해주시고는 수요일에 다시 오라고 하셨지. 내 얼굴은 아마 만신창이였을 거야. 마지막에 증기로 호흡기를 소독할 때는 정말 누가 내 얼굴 안을 온통 헤집어 놓은 느낌이었으니까.

병원 진료가 끝나고 애인과 함께 우리 집으로 돌아오는데, 날은 덥고 열이 펄펄 나니까 절로 눈물이 나왔어.

"아니 왜 아픈데 엄마한테 말을 안 했어?"

"너 또 신데렐라병 걸려서 혼자 궂은일 도맡아 하려고 하지 말고."

"쿨한 척하지 마."

오랜만에 아프니까 예전에 아플 때 많이 들었던 말들이 다시 기억났어. 나는 어렸을 때부터 아파도 부모님한테 말하지 않았어. 말해야 되는지도 몰랐고, 사실. 그냥 혼자 끙끙 앓다 보면 언젠가 낫겠지. 부모님이 어떻게 해줄 수 있는 것도 아닌데 굳이 말해야 하나. 이런 생각이었던 것 같아. 그래서 엄마는 항상 내 약봉지나 병원 영수증을 보고 뒤늦게 알아차리곤 나한테 '녹마야, 너 어디 아파?'라고 묻곤 했지.

두 번째 말은 내가 중학교 때 다녔던 공부방 선생님이 하셨던 말이야. 그때 처음 '신데렐라병'이라는 말을 들었어. 처음엔 뭔 말씀을 하시는 건지 감이 오지 않았지만, 생각하면 할수록 좀 억울하다는 마음이 들었던 것 같아. 마치 스스로를 열악한 환경에서 홀로 온갖 역경을 겪어내고 누군가 도움의 손길을 내밀어줄 때까지 기다리는 느낌이잖아. 나는 도움의 손길을 바란 적도 없고 그런 게 있는 줄도 모르고 살아가고 있었는데 말이야. 사실 어떻게 도움을 청하는지 몰랐다는 게 더 맞는 말 같네. 우리처럼 가정이 화목하지 않았던 애들이 늘 겪는 것이 '애정결핍'과 '지나친 의무감'인 것 같아. 나는 이 고통과 힘듦을 오롯이 혼자 겪어내야 한다고 생각하는 거 있잖아.

그런데 이번엔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 옆을 보니까 애인이 있었어. 애인한테 내가 약을 먹고 잠들 때까지 옆에 있어달라고 했지. 정말 그래 줬고, 한 시간쯤 자다 일어나니 열이 씻은 듯이 내려갔어. 내 옆에 애인이 대(大) 자로 뻗어서 자고 있더라. 예전엔 내가 제일 도움을 청하기 싫은 사람이 바로 내 애인이었어. 불과 5-6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그랬지. 내가 학교에서 책을 한가득 들고 낑낑 대면서 걸어가고 있을 때, 애인이 다가와서 도와주겠다고 했지만 나는 매몰차게 싫다고 하며 휙 지나쳐 갔어. 나는 혼자서도 다 해낼 수 있는 사람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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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많이 달라졌어. 나도 아픈 날에는 혼자 있기 싫고, 혼자 견디기 힘든 무거운 짐을 들었을 때는 그 짐을 같이 짊어져 줄 사람이 필요해. 그러니까 우리 많이 아프고 힘들 때는 꼭 서로에게 도움을 청하자. 그게 민폐고 나약한 행동이라는 바보 같은 생각일랑 하지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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