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지갯빛 감정을 나누는 우리가 되길 [아루쿠마]

2020. 07. 23

by 잠긴 생각들

이틀 전 너와 피치를 만나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지. 가벼웠다가 무거웠다가를 반복하는 인생에 대한 대화. 우리 모두 피곤을 이겨내지 못하고 거의 반쯤 졸면서 대화한 것 같기는 해도 좋아하는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다는 사실 자체로 즐거웠어. 너무 진지해서 조금 분위기가 다운된다고 생각할 때도 없었던 건 아니지만, 나에겐 그런 시간들이 소중해. 그 순간만큼은 그저 나와 비슷한 줄만 알았던 친구의 인생을 대신 체험해볼 수 있으니까.

가치관과 인생, 살아가는 이야기를 하다 보면 청자가 되는 순간 나는 그 이야기의 주인공(나와 대화하는 상대)인 화자의 인생을 머릿속에서 살아보곤 하거든. 별것 아닌 상황도, 중요하고 진중한 상황도 그 자체로 내 인생에 새로운 깨달음을 주거나 어떤 의미가 되기도 하더라. 그래서 어제 피치와 네가 진지한 사람에 대해 이야기하는데, 조금 뜨끔하기도 했어. 나도 분류하자면 노잼 인간 진지한 인간이라는 타이틀이 어울리는 사람이라- 하하...

우리 언젠가 감정 쓰레기통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잖아. 감정 찌꺼기를 여과 없이 퍼부어버리는 사람을 대하는 게 힘들다고 말이야. 어릴 땐 친구가 나에게 심각하고 슬프고 속상한, 누구에게 까놓고 말하기 어려운 이야기를 할 때 ‘얘는 나를 정말 친한 친구로 생각하는구나!’ 했었어. 그래서 마치 불행 배틀을 하는 것 마냥 “나는 사실•••” 하며 서로의 고민을 털어놓고 서로를 상담해 줬지. 그게 가장 친한 친구 간의 끈끈하고도 특별한 우정이라고 믿었었어.

전에도 말했듯이 지금의 내 생각은 많이 달라졌어. 서로 고민을 털어놓을 수 있는 사이라는 건 그만큼 가까운 사이라는 지표가 될 수 있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고민을 털어놓을수록 가까운 사이가 되는 건 아니잖아? 자꾸 한 관계에서 서로가 부정적인 감정만을 공유하다 보면 그 대화가 관계를 좀먹는 것 같아. 누군가와 가까우면서도 건전한 관계를 유지하려면 긍정과 부정 또 그 외의 감정을 다채롭게 나누면서 한쪽으로만 치우치지 않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해.

네가 아끼는 사람들의 고통을 대신 짊어지면서까지 그들의 곁을 지키고 싶다고 생각하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야. 네 예상대로 나는 엄청나게 아끼는 사람들이 아니라 관심 있는 사람들의 인생에 대해 들으면서도 내 모든 감정을 끌어다 슬퍼하고 행복해하고 괴로워해. 당연히 많은 사람들은 행복보다 자신의 불행과 우울에 대해 더 이야기하고 싶어 하기 때문에 (물론 나조차도 그래), 나도 주로 타인의 우울이 내 마음으로 파도가 치듯 쏠려오면 힘들고 괴로울 때가 많아. 하지만 나는 그런 사람인 걸?

네 말대로 남의 불행을 접하면서 지치는 것도 사실이지만, 나는 쭉 그렇게 살아왔고 아마 정도의 차이가 있더라도 앞으로도 난 그렇게 살 거야. 어떤 면에서는 내 기준으로 그게 옳은 행동이라고 느끼기까지 하니까. 또 가끔은 오히려 남의 행복까지 내가 차지하고 기뻐하기도 하는 걸? 그런데 너는 나와 달리 이성적인 성향이 크니까 이성을 잃고 요동치는 감정에 휩쓸리는 상황들이 겁나거나 더 크게 다가오는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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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힘들어하는 모습을 자주 보여준 게 미안하다고 하면서 내게 힘들었냐고 물었지? 그럴 때마다 전혀 아무 감정도 느끼지 않았다면 거짓말이겠지. 나는 네가 힘든 걸 지켜보면서 몰래 울었던 기억도 있으니까. 하지만 중요한 건 네가 나에게 그런 감정만을 드러내는 사람이 아니라는 거야. 나는 우리가 다양한 감정을 솔직하게 표현하고 진지하게 들어준다는 점이 참 소중해. 웃고 놀라고 울고 짜증 내고 기뻐하고 그런 모든 순간들이 말이야.

한 마디 더 보태자면, 전에 책에서 친구의 가족이나 배우자가 죽고 난 후 그 친구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에 대한 내용을 읽은 적이 있어. 그런 상황에 처하면 어떤 말을 해줘야 할까 누구라도 곤란하겠지. 그런데 어떤 무례한 말을 듣는 것보다도 그 당사자를 힘들게 하는 건, 본인을 보고도 어쩔 줄 몰라 못 본 척 피해 가는 사람들이었대. 또 듣기 힘든 위로의 말은 힘내라는 말. 최선의 위로는 당연히 힘든 시기라는 걸 인정해 준 후에 내가 필요할 때 언제든 전화해라, 너의 곁에 내가 있다는 말을 전하는 것이라고 하더라. 우리는 상담 전문가도 아니고, 해결사도 아니잖아? 우리가 그 순간 나와 너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것, 그것만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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