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그 마음처럼 [아루쿠마]

2020. 08. 16

by 잠긴 생각들

너희 가족에게도 가훈이 있었니? 우리 집 가훈은 ‘처음 그 마음처럼’이었어. 초등학생 때 각자 가훈을 적어 오라는 숙제를 받았는데, 그때 우리 집 거실에 걸려 있는 액자 속 그 글귀가 우리 가족의 가훈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어. 아빠에게 물어봤고 역시나 우리 아빠답게 길고 긴 설명으로 왜 그 글귀를 가훈으로 정했는지 알려주더라고. 아직도 지루한 설명을 들으면서 ‘처음 그 마음처럼’ 글자 하나씩 마음에 새겨보았던 장면이 생생하게 머릿속에 떠올라.

초심을 잃지 않으려 처음 그때의 마음을 잊지 않는다. 어릴 때는 그냥 우리 가족의 가훈이라고 하니까 뭔가 멋있는 말인 것 같고, 기억해둬야겠다고 다짐했었던 것 같아. 하지만 막상 살아가는 과정에서 가훈에 대한 생각은 자주 하지 않았어. 어쩌다가 며칠 전 남자 친구와 이야기하던 중에 가훈에 대한 주제로 대화를 하게 된 거야. 잊고 있었던 줄만 알았는데, (글귀가 짧기는 해도) 정확하게 기억이 나더라. 그리고 신기하게도 지금의 나에게 필요한 말이었어.

네가 듣기에는 너무 끼워 맞추기 같이 느껴지려나? 그래도 나에겐 그 말이 나름 자주 가슴에 와 닿는 말인 것 같아. 알다시피 나는 MBTI로 따져봤을 때 ---J형 인간이잖아. 근데 J라고 해서 항상 처음과 같은 마음으로 일을 수행하게 되지는 않는 것 같아. 너도 이 부분은 공감하려나? 나와 같은 J니까 말이야! J가 계획을 착실하게 세우고 타임 테이블에 맞게 꾸준히 일을 해나간다고들 하지만, 사실 나는 슬럼프가 왔을 때에도 부정적인 감정 그대로 묵묵하게 혹은 꾸역꾸역 참고 일을 해나가게 되더라. 오히려 자주 게으르다는 오해만 받는 ---P형 인간들은 말 그대로 삘이 오지 않을 때 잠시 멈추거나 즉흥적으로 마음이 원하는 대로 일의 진행을 바꿔보기도 하는데 말이야.


IMG_0046.jpg 오늘 다녀온 카페에서 찍은 사진 (그냥 너무 좋길래)


스스로는 부정적인 감정이 생겼다고 그 일을 그만두면 마치 패배한 기분이 들 것 같아서 억지로 억지로 해내 보려고 하는데, 남자 친구 눈에도 너의 눈에도 내가 버거워하고 있는 게 다 보이나 봐. 나름 스스로를 속이면서 계속 꾸준하기만 하면 해결될 거라고 믿고 있었는데, 요즘은 그게 아닌가 싶기도 해. 그래서 우리 가족의 가훈이 나에게 어떤 의미의 깨달음을 줬어. 꾸준히 달려가다가 잠시 걸어보기도, 다른 길을 기웃거리기도, 멈춰서 쉬어보기도 하면서 뭐든 처음 그 마음을 잊지 않고 내가 왜 이걸 원했는지, 왜 하려 했는지 되새겨보면서 가고 싶어 졌어.

여담의 서브 콘텐츠 제작 때문에 오늘 밤까지 책 한 권을 추천해야 하잖아. 그래서 이 책 저 책을 뒤지다가 '여자로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를 오랜만에 펼쳐봤어. 이 교환일기를 처음 너에게 제안했을 때의 마음을 느껴보기 위해서. 네가 예상했듯이 내 욕심대로 많은 일을 한 번에 진행하려다 보니, 조금은 지쳐버렸고 솔직히 어떨 땐 교환일기 한쪽조차 버겁게 느껴지기도 했거든. 그래도 이번 기회에 이 책을 다시 읽으면서 마음을 다시 바로잡을까 해. 조금 헤매거나 느리게 가더라도 처음 그 마음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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