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론 나의 용량은 여기까지지만, [아루쿠마]

by 잠긴 생각들

지난주에 내가 교환일기를 써야 할 차례라는 것도 잊은 채, 그렇게 정신없는 1-2주를 보냈다는 게 지금도 떠올릴수록 스스로에게 놀라워. 아무리 스케줄이 많아진다고 해도 일정 하나를 누가 먼저 말해줄 때까지 모르고 있던 적은 없는 나인데... 네가 일부러 나에게 부담이 될까 내 차례라는 말을 하지 않고, 교환일기를 써뒀다는 카톡을 보낸 걸 확인하고는 잠깐 멍했던 것 같아.





이번 주에 드디어 모든 시험을 치르고 나서 너랑 팟캐스트 녹음을 할 때, 네가 작년 학생회 시절을 언급하면서 그때 ‘바쁨’의 기준이 바뀌었다고 이야기했었던 것 기억나니? 나 그 말을 들으면서도, 그리고 이후에도 그 말을 떠올리면서 생각했어. 그래, 이번 중간고사 시험기간이 나에겐 바로 그 바쁨의 기준이 바뀌어버린 기간이구나 하고. 네가 그 말을 하기 전에도 스스로 생각하긴 했어, ‘진짜 이번에 내 용량의 한계를 느끼는구나’ 하고. 이번 시험은 고작 4과목뿐이었는데도 내가 왜 그랬던 걸까 곰곰이 생각해봤어.


초중고 학창 시절부터 대학생이 되고 나서도 나는 언제나 학업에만 충실히 매진하는 타입의 사람이었어. 그러니까 오로지 성적, 학점에만 말이야. 어릴 때부터 늘 언젠가 해보고 싶다고 생각해왔던 건 제과제빵 분야의 일이었어. 왜 하필 그 분야인지 남들처럼 명확한 계기나 특별한 이유가 있는 것도 아니었지만, 그래도 처음으로 뭔가 해보고 싶다고 생각했던 일이었어. 그리고 부모님으로부터 그 꿈은 좌절당했지. 사실 해 본 것도 없이 좌절된 거야. 중학생 때까지 꿈을 키워왔지만, 엄격한 엄마 아빠에게 차마 학원을 보내 달라고 조를 용기도 없었고, 우리 집은 그럴 형편도 아니라는 걸 진작에 눈치채고 몸을 사렸으니까. 이게 학업에만 목메는 거랑 무슨 상관이냐고? 나는 남들처럼 꿈도, 잘하는 게 있는 재능도 타고나지 않은 사람이니까 공부라도 잘해야 한다고 생각해왔던 것 같아. 중학교에 가면서 초등학생 때보다는 전교 등수로 좋은 편에 속하는 성적을 받았고, 성적 때문에라도 나한테 말을 걸고 관심 보이는 친구들이 생겼어. 뭔가 인정받는 기분이었어. 그렇구나, 성적이 좋으면 누군가 나에게 관심을 갖고 또 인정해 주는구나. 꿈도 재능도 없는 나는 관심이나 인정을 받으려면 공부라도 잘해야 하는 사람이라고 자연스럽게 생각하게 된 거야.


어느 순간 그게 나를 덮친 것 같아. 건강이 워낙 나쁜 편이라 남들처럼 끝의 끝까지 미친 듯이 공부에만 매진할 수는 없었지만 (나는 내가 너무 약해 빠진 걸 잘 아니까... 무리했다가는 진심으로 죽는 병에 걸릴까 봐 겁이 났어.), 그래도 늘 최대한 학업에 최선을 다하면서 다른 건 뒤로 제쳐두고 살았어. 동아리나 봉사활동, 독서, 운동, 내가 하고 싶은 공부 그런 건 언제나 뒷전이었어. 친구들이 공부 아닌 그런 일을 열심히 하는 걸 보면서 ‘괜히 공부하기 싫으니까 저러지. 진짜 한심해.’라고 생각했었다? 당연히 고3 때까지 그런 생각을 하며 열심히 공부했고, 교과전형으로 모든 대학의 수시 입시를 준비했고, 지금의 대학에 들어왔어. 대학에 와서도 별로 다를 건 없었어. 나도 네가 혼자 녹음했던 팟캐스트에서 말했듯이 우리 과 공부 정-말 재미없었어. 친구들처럼 좋아서 한 것도 아니고, 그냥 열심히 해야 하니까, 이게 지금 해야 할 공부니까, 성적이 나올 테니까, 장학금을 받아야 하니까 했어. 그리고 다른 건? 알다시피 생활비를 벌기 위해 했던 아르바이트 외에 내가 한 게 뭐가 있었니.

이 구구절절한 이야기를 쭉 하는 이유는 현재의 시험기간이 지금까지의 내 삶의 시험 기간과 달랐던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서야. 1년 반의 휴학을 마치고 다시 학교로 돌아온 나는 이전과 많이 달라졌어. 지금은 혼자가 아니라 조랭이와 ‘함께’ 토익 공부를 하고, 마음 맞는 여자들과 여담 일을 하고, 매일같이 좋아서 하는 운동이나 요가를 하고, 학과에서 하는 프로그램 중 유일하게 참여 중인 성 평등 도서 모임 활동을 하고, 너와 팟캐스트를 1년 넘도록 진행하고 있지. 그래서 내 시험기간이 이렇게나 달라진 거야. 이제까지 공부만 하던 시험 기간과는 다를 수밖에. 원래라면 미리 몇 주 전부터 필기 정리를 해두고 몇 차례나 돌리면서 나름 여유 있게 스케줄을 짜서 시험공부에만 매진했을 텐데... 이런 스케줄로는 도저히 그럴 수가 없으니까.


그런데 이 변화가 힘들어 죽겠어서 싫다는 게 아냐. 물론 내 용량은 여기가 한계이지만, 이전과는 달라진 내가 나는 기뻐. 생각해보면 아무리 내가 영양제를 챙겨 먹고 따뜻하게 몸을 챙겼어도 이 정도 바쁨과 스트레스가 겹쳤으면 분명 원래의 나라면 시험기간 중간에 한 번쯤 크게 아팠어야 했는데. 전-혀 그럴 기미도 보이지 않았어. 이게 내 몸이 나에게 보내는 긍정의 신호는 아닐까? 지금 잘 하고 있다고, 그렇게 너가 하고 싶은 모든 일을 고루하며 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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