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게 우리의 스펙일까? [녹마]

여성들의 이야기를 담습니다, '여담'

by 잠긴 생각들

하루 종일 몸이 으슬거리고 침을 꼴깍 삼킬 때마다 너무 아파서 스트렙실을 하루에 다섯 알씩 녹여먹던 시기를 지나서, 이제는 몸이 꽤 나아졌다는 걸 느껴. 하필이면 시험기간에 몸살감기가 걸려서 쓸데없이 고생을 했지. 시험공부 자체는 그다지 힘들지 않았는데, 몸이 아프니까 정말 정말 지치더라. 막판에는 정말 포기하고 싶은 심정이었어. 그래도 시험이 쉽게 나올 것 같은 예감이 있었고, 그렇게 쉽게 나온 걸 나만 못 볼 수는 없다는 생각에 끝까지 약 기운으로 버티면서 버텼던 것 같아. 시험 볼 때쯤이 되니까 스트레스 때문에 편두통이 심하게 생겼지. 뭐, 물론 과제들은 아직 많이 남았지만 적어도 시험은 끝났다는 사실에 만족 중이야. 시험이 끝난 다음 날 득달같이 본가로 요양 왔으니까 말이야.


오늘은 애인이랑 같이 코스모스를 보러 갔어. 내가 보고 싶다고 노래를 불러대던 거였거든. 그런데 너무 늦게 가서 그런지 많이 져있더라. 물론 기대하던 만개한 코스모스는 아니었어도 애인과 함께 사진도 찍고 흔들의자에 기대앉아서 노을을 보면서 이런저런 수다를 떠는데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어. 그래, 난 원래 이렇게 생기가 넘치는 사람이었지. 하는 느낌. 오랜만에 살아있는 느낌에 마음이 설레기까지 했어. 그래서 오늘은 참 허무맹랑한 짓을 많이 했던 것 같네. 애인을 두고 혼자 저만치 달려가거나 길에서 크게 소리 지르거나, 말도 안 되는 똥고집을 부리거나. 그게 다 내가 지나치게 신나서 하는 짓인 걸 아는 건지 애인도 다 웃으면서 맞춰주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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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험기간에는 정신없다는 핑계로 '여담' 단톡방을 거의 확인하지 못했어. 확인을 해도 대충 읽고 대답만 하는 정도? 그러다가 시험이 끝난 다음에야 찬찬히 읽어보고, 우리가 꽤나 중요한 기로에 선 게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었어. 다들 심각하게 고민해야 된다는 의미는 아니지만, 어쨌거나 우리를 '여담'으로서 존재할 수 있게 해 줬던, 적어도 시작을 할 수 있게 해 줬던 청춘두두두 지원사업이 끝났잖아? 이제 우리는 "언제까지, 누구와, 어디까지, 어떻게"를 정해야 하는 단계인 것 같아. 너도 그렇겠지만 나는 사실 이 '여담' 프로젝트에 애정이 많아. 평생 가지고 갈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내가 처음으로 열과 성을 다해서 시도해봤던 일이었고, 그 일을 하면서 엄청난 성취감을 느꼈어. 그렇기 때문에 지원사업이 끝났다고 해서 그만둘 생각은 애초부터 없었지. 그렇지만 그다음은?

그저 열정과 호기만으로 어디까지 갈 수 있을까 싶기도 해. 만일 내가 이 일을 하나의 스펙 정도로 여겼다면 나는 지원사업이 끝나면서 곧바로 그만두고 다른 스펙을 찾아 헤맸을 거야. 물론 이 일이 내 스펙이 될 수는 있겠지만... 나는 정말로 '여담'이 하는 일에 의미를 두고 있고, 그렇기 때문에 더 크고 싶다는 욕심이 드네. 우리들의 열정 페이로만 재정을 충당할 수는 없으니까 다른 방법으로 지원받을 방법을 구해봐야겠지. 우리 커뮤니티의 정체성도 확립해야 할 테고. 그리고 무엇보다 멤버들이 자신의 '우선순위'를 정하고 공유하는 것이 중요한 것 같아. 내게는 '여담'이 1순위일 수 있어도, 다른 멤버에겐 본업 다음으로 우선시하는 일일 수 있으니까.

앞으로 우리는 어디까지 가게 될까. 우리가 갈 곳은 있는 걸까. 조그만 틈새여도 괜찮고 구불구불 오솔길이어도 괜찮으니까 길이 있었으면 좋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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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시대에 스펙 하나 없으면 안 된다고들 했을 때, 대체 그 썩을 놈의 스펙은 어떻게 구하는 건가 싶었는데 이렇게 생기기도 하는 거구나 싶네. 이렇게 진심으로 애정을 가지게 되는 일 말이야. 좀 여기저기 정신없는 글이었던 것 같네. 내가 '여담'에 정말 애정을 가지게 되니까, 동시에 이 일을 어디까지 가지고 갈 수 있을까 하는 불안이 생기기 시작했나 봐. 마치 같은 과 사람들과 하는 동아리처럼 호기롭게 시작해서 흐지부지 끝나버리는 그런 일은 없었으면 하거든. 아무튼 이번 주 회의에서 다 같이 만나서 얼른 또 재밌게 이야기하고 싶다. 분명히 다들 시끄럽게 정신없을 테지만 그것조차 전혀 싫지 않아. 내일은 또 과제 지옥에 빠질 예정이니까 오늘은 여기까지 쓸게. 잘 자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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