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시간 동안 바느질을 했다.
구부러진 바늘에 진분홍 실을 끼웠다. 바늘귀를 보는 내 눈의 초점이 달달 떨렸다. 노안 초기 증상. 시작부터 안 풀리니 성질이 났다. 이 바느질은 계획에 없던 노동이었다. 내가 이걸 왜 해야 돼? 천을 찢어먹은 당사자를 불러서 "네가 저지른 일이니 네가 책임져."라고 바늘을 던져주고 싶었다. 그러나 막내는 모기장 안에서 뽁뽁이 장난감을 뽁뽁 누르며 놀 뿐이었다. 요즘 저 뽁뽁이 장난감이 대유행이다. 누르는 행위 외엔 아무것도 이끌어낼 수 없는 물건. 짚신벌레처럼 단순한 장난감이다. 아이들은 저 놀이를 재밌어하지만, 처리해야 하는 단순한 일이 산적한 나에겐 하잘것없어 보인다. 막내는 뽁뽁이의 쌍비읍은 알아도 바느질의 비읍자는 모른다. 그런 저놈이 무슨 재주로 모기장 커버를 수선하겠는가. 아이가 고의로 모기장 커버를 찢은 것이 아니니 화내지 말자. 화내지 말자.
막내는 몇 분 전 모기장 커버에서 모기장을 꺼내려다 힘 조절에 실패했다. 모기장 커버의 손잡이가 부욱- 찢어졌다. 원터치 모기장 커버는 튼튼함과는 거리가 멀다. 흐물거리는 부직포로 만들어졌는데 얇디얇은 재질이며 촌스러운 색감까지 몽땅 엉망진창이다. 그러나 쓰지 않을 수는 없다. 원터치 모기장은 우리 집 필수품이다. 이 집은 4월부터 11월까지 모기가 버글버글하다. 원터치 모기장은 동그랗게 접은 후 납작한 원형 커버에 넣어 보관한다. 이 커버 없이는 보관이 불가능하다. 그런데도 커버를 이따위로 만들어놨다. 원터치 모기장 제작자 여러분, 이게 최선입니까?
너덜너덜해진 모기장 커버에 넋이라도 있고 없던 나는 현실을 직시하고 반짇고리를 꺼냈다. 반짇고리를 열자 알록달록한 실에 칭칭 감긴 실패들이 눈에 들어왔다. 하루의 집안일을 다 마친 후 드디어 각 잡고 책을 읽어보려 했던 나의 계획이 실패했음을 깨달았다. 짜증이 솟구쳤다. 반짇고리를 밀어버리고 컴퓨터 앞에 앉았다. 검색창에 '원터치 모기장 커버'를 쳤다. 모기장 커버만 판매하는 곳은 한 군데도 없었다. 하하하 돈 굳었네.
도망갈 곳이 없었다. 모든 걸 포기하고 얌전히 바늘을 쥐었다. 부직포에 바늘을 꽂아 당기고, 다시 부직포에 바늘을 꽂아 당기고, 또다시 부직포에 바늘을 꽂아 당겼다. 단순노동은 왜 이렇게까지 단순한 것인가. 뜨끔 뜨끔 아파오는 목과 허리도 거슬렸다. 한숨이 푹 푹 나왔다. 그래도 계속 손을 놀렸다. 영화 「리틀 포레스트」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주인공 혜원은 비바람에 넘어진 벼를 세우며 투덜댔다. 혜원의 고모는 그런 조카에게 말했다. "입 놀릴 시간에 몸 놀리면 언젠가 끝이 나게 돼 있어." 벼가 넘어진 건 혜원의 탓이 아니지만 그녀는 벼를 세워야 했다. 모기장 커버가 찢어진 건 내 탓이 아니지만 내가 보수해야 했다. 손 놀리다 보면 언젠가 끝날 일이다. 미칠듯한 단순함과 육체의 불편함을 조금만 견디면 된다.
모기장 커버를 원상 복귀 하기까지 한 시간이 걸렸다. 숙제를 끝낸 뿌듯함보다는 빽빽이로부터 해방된 자유를 느꼈다. 어릴 때 '빽빽이'라는 숙제가 있었다. 공책 한 면에 공부한 흔적을 빽빽하게 적어가는 숙제였다. 습득을 목적으로 한 끄적임이 아니라 종이를 채우기 위한 노동이었다. 생각해 보니 나의 바느질은 빽빽이만큼 무의미하진 않다. 빼곡하게 적었던 글자들은 하나도 기억나지 않지만, 부직포를 뚫고 실을 견인한 바늘의 전진은 모기장의 안식처를 중건해냈으니.
단순노동은 단순해서 지루하지만 꽤 즉각적이고 뚜렷한 열매를 준다. 이불을 개서 장롱에 넣으면 방이 넓어진다. 행주를 삶으면 쉰내와 얼룩이 사라진다. 채소를 썰고 냄비를 휘저으면 먹을 음식이 생긴다. 찢어진 부직포를 기우면 모기장 커버가 고쳐진다. 내 하루의 반 이상은 이런 단순노동으로 차 있다. 신나고 재밌진 않지만 이런 삶에 어느 정도 적응은 했다.
그래도 '튼튼한 원터치 모기장 커버'가 판매된다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주문할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