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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욕 삭제 능력

에세이 + 초능력

by 녹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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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생 시절, 친한 친구가 나더러 자폐아 같다고 했다. 그 말이 기분 나쁘지 않았다. 나도 내가 그렇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나는 공강 시간마다 과 건물 옥상으로 올라갔다. 옥상에는 낡은 소파가 있었는데 거기 혼자 멍하게 앉아 있었다. 수업 사이의 짤막한 쉬는 시간엔 책상에 엎드려 있었다. 속이 너무 시끄러워서 그랬다. 외부의 소음이라도 피해보려고 그랬다. 보다 못한 어느 선배가 조심스럽게 상담 선생님을 주선해 주었다.


상담 선생님과 처음 만난 자리에서 두툼한 심리 검사지를 풀었다. 결과가 궁금했다. 우울하다고 나오려나? 비사교적이라고 나오려나? 사회 부적응자이려나? 결과는 놀라웠다. "다른 영역에 비해 특히 저조한 영역이 있는데… '의욕'이 너무 없어요."


충격을 받았다. 이 무슨 엉뚱한 소리인가. 나는 대학에 와서 고등학교 4학년, 고등학교 5학년처럼 살았다. 학교 실기실에서 밤새우며 작업했고, 집에 돌아오는 지하철 안에서는 교양 수업을 복습했고, 집에선 리포트를 썼다. 나를 '무無의욕'이라고 판단한 저 검사가 의아했지만 한편 이해되기도 했다. 내가 착실하게 생활한 건 전공에 대한 열정 때문만은 아니었으니까.


대학 합격 소식을 들은 날, 미술 학원에서 짐을 싸서 집으로 돌아왔다. 엄마와 함께 그림 도구를 나눠 들고 걸었다. 나의 발걸음과 마음은 가벼웠다. 나도 모르게 엷은 콧노래를 부르는 실수를 저지를 만큼. 엄마는 소리 나는 쪽을 쳐다보며 이렇게 말했다. "넌 기분 좋냐? 난 안 좋은데?"


마음이 급속 냉각되었다. 집까지의 남은 길을 죄인처럼 걸었다. 집에 들어와서도 엄마는 외할머니께 우렁차게 말했다. 딸이 들어간 대학이 아쉽다고, 마음에 안 든다고. 그날 밤에 많이 울었다. 노력해서 대학은 붙었지만 노력해도 엄마를 만족시킬 수는 없었다. 좌절했고 지쳤다. 좀 미안했고 많이 화가 났다. 어쨌거나 내가 들어간 학교는 내 고집과 열등함의 상징이 되었다. '너까지 문제 일으키면 안 된다'라는 말을 들으며 자랐는데 이 대학은 약간의 '문제'였다. 여기서나마 실패하면 큰일이었다. 성실한 대학생 말곤 선택지가 없었다. 부모님은 늘 그렇듯 안팎으로 신경 쓸 일이 많으셨으니 나는 또 하나의 골칫거리 되지 않기 위해 애썼다. 아무 문제 없는 듯 살았다. 부모님이 근황을 물을 땐 "별일 없어요. 잘 지내요."라고 대답했다.


속시원히 이야기를 해 본 경험이 없었다. 있는 듯 없는 듯 조용히 살라고 요구받은 시간이 길었다. 발가락 끝에서부터 용기를 끌어올려 무언가를 이야기해 본 적이 있기는 있었다. 그러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나는 점점 내 감정이나 의견 같은 건 지구인 모두가 혐오하고 거부할 거라고 오해하게 되었다. 그래서 상담 시간 역시 고통스러웠다. 내가 뭔가를 말해야 상담 선생님도 조언을 해 주실 텐데 입이 통 떨어지지 않았다. 내 이야기가 너무 가치 없고 한심하고 별 볼일 없고 시시한 것 같아서 꺼내놓기가 겁났다. 나는 마침내 상담 선생님 앞에서 울면서 말했다. "…말을 못 하겠어요."

서너 주 후에 상담은 끝났다. 내가 일방적으로 나가지 않아서 중단돼 버린 것이었다.


말수 없는 나의 마음속엔 수만 개의 단어가 있었다. 내가 눌려 있었을 뿐이다. 입구가 짓눌린 병에서는 내용물이 나올 수 없었다.


그 때로부터 20년이 흘렀다. 나는 더 이상 스스로를 옥상 같은 곳에 고립시키지 않는다. 입이 안 떼져서 우는 사람도 아니다. 훨씬 편하게 말하는 인간이 됐다. 변하게 된 가장 큰 이유는 내 말을 온몸으로 들어주는 존재들 덕분이다. 하나님과 친구들과 새로운 가족들 때문이다. 내 말에 관심 없는 이들이 여전히 더 많지만 상관없다. 용납의 체험이 마음의 보호막이 되어준다. 지금의 나는 '의욕 없음'을 탈출하여 '의욕 있음' 지나 '의욕 과다' 근처에 와 있다. 책을 더 많이 읽고 싶고, 글도 더 많이 쓰고 싶고, 그림도 더 잘 그리고 싶은 의욕이 너울거린다.


몸이 어떻게 되든 잠을 더 줄여 볼까? 작정하고 일벌레가 되어 봐? 그러면 안 된다는 걸 안다. 그렇게 살다가 응급실에 가 봤다. 쓴맛을 본 적이 있으면서도 나는 과다 의욕으로 위태롭다. 폭주 기관차가 될 위험이 다분하다.


고민하던 나는 예전의 그 상담 선생님을 찾아갔다. 20년 전의 내 상태가 역전되었음을 알려드렸다. 선생님은 내가 척척 말 잘 하는 사람이 된 것에 기뻐하시면서도 의욕 과다의 고충을 깊이 이해해 주셨다. 상담 선생님은, 과거에 내가 경험했던 '무無의욕'을 끄집어내서 '의욕 삭제 능력'으로 변형·승화시켜보라고 제안하셨다. 나는 상담 선생님의 안내에 따라 무의식에 가라앉아 있던 '무의욕'을 찾아냈다. 그 후 내 뱃살과 엉덩이에 축적된 잉여 칼로리를 정신 에너지로 변환하여 '무의욕'에 몽땅 주입했다. '무의욕'은 트랜스포머에 나오는 옵티머스 프라임처럼 착착찹찹촥촥 변신했고, 어쩌다 보니 '의욕 삭제 능력'으로 완성되었다.


이 능력이 제대로 작동하는지 검증해 볼 차례였다. 마침 과자가 먹고 싶었다. 식욕도 넓은 의미로는 의욕의 한 종류이니 과자 먹고 싶은 마음을 삭제해 보기로 했다. 의욕~ 삭제!


헐 대박. 식욕이 싹 사라졌다. 과자가 전혀 끌리지 않았다.


원통했다. 나는 왜 이 능력을 좀 더 일찍 터득하지 못했나. 채식하기 전에 정크푸드나 과자, 야식, 믹스커피 따위를 향해 식욕이 발광하던 시절이 있었다. 이 능력이 그때도 있었더라면 먹는 것 앞에서 처절한 무력감을 느낄 필요가 없었을 텐데. 그뿐만 아니라 엄마가 바라던 대학은 당연하고 하버드까지 합격했을지도 모른다. 쉬고 싶은 욕구, 자고 싶은 욕구를 지워버리면 손쉽게 공부 기계가 됐을 테니까.


아니다. 이건 내가 바라던 그림이 아니다. 저런 식으로 '의욕 삭제 능력'을 사용하려던 게 아니었다. 목적지로 가는 길에 박혀있는 자갈이나 길 옆에 핀 들꽃들을 전멸시키려던 게 아니었다. 요철 없는 미끈한 길을 달리면 더 쉽게 폭주 기관차가 될 것이다. 괴물 같은 관성도 덕지덕지 붙을 것이다. 목적지에 도착해서도 멈춰지지 않아서 출입통제 라인을 박살 내고 절벽 끝까지 내달릴 것이다. '의욕 삭제 능력'을 개발한 것은 생산적이고 성공적이고 월등한 사람이 되기 위함이 아니었다. 뭔가를 좀 '덜'하기 위해서였다. 느리더라도 내 속도를 유지하기 위해서였다. 아무것도 성취하지 못할지라도 의연하기 위해서였다.


나는 이 꽃 저 꽃을 날아다니는 나비 흉내를 내는 중이다. 민들레 위에 앉아 놀다 보면 옆에 핀 냉이꽃이 궁금해진다. 그럼 거기로 날아가서 또 재밌게 논다. 이런 식으로 전진하는 나비는 목적지에 빨리 도착할 수 없다. 사실 목적지가 어디인지도 모른다. 그저 나는 오늘 만난 꽃을 스쳐 지나가버리고 싶지 않다. 꽃 한 송이가 받아야 할 충분한 시선을 주고 싶다. 꽃과의 만남을 통해 나의 내면이 확장되는 짜릿함을 누리고 싶다. 지금 나의 꽃은 글쓰기, 그림 그리기, 책 읽기이다. 내 이야기를 글과 그림으로 말하고 싶고, 책에 담긴 다른 이들의 이야기를 듣고 싶다. 이런 '의욕'은 슈퍼컴퓨터의 능률로 해치워 버릴 '일감'이 아니다. 시간을 들여 요리조리 바라보며 향기를 맡고 싶은 영역이다. '더 많이'라는 문법과 나의 여정은 섞일 수 없다. 과속와 성과의 시대에 찢겨진 '순간'을 붙잡고 싶다. "매시간을, 매분을, 매초를 억지로 서로 잇고 가득 채우는 대신에 그것들이 숨을 내쉬도록, 더욱 심오해지도록 내버려 두"*고 싶다.


그렇다고 해서 '과다 의욕'을 '의욕 삭제 능력'으로 산뜻하게 제거하려니 그것도 망설여졌다. 나는 한때 의욕 미달이었던 사람이지 않았던가. 바쁘게 생활했지만 그건 외부의 힘에 의해 굴러가던 찌그러진 깡통의 모습에 불과했다. 이제 나는 자유롭고 능동적인 의욕으로 움직인다. 눈치 보지 않고 호기심을 뻗는다. 책임은 가볍게 추렸다. 하고 싶은 일을 대책 없이 한다. 찰랑거리는 이 의욕들은 내 마음에 어렵게 돋은 새 살이다. 언제까지 나비처럼 살아도 될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올 한 해는 좋을 대로 나풀거려 보라고 셀프 허락해버렸다. 내년 일은 모르겠다. 내년 가서 생각할란다.


차오른 의욕의 표면 장력이 깨질 기미가 보이면 수문을 열어서 조금 덜어내야겠다. 약간의 의욕이라도 아주 없애버리는 건 별로다. 질량이 보존되는 게 우주의 법칙인데 내가 함부로 거스를 수는 없지. 내가 방출한 의욕은 그것을 바랐던 누군가의 빈 마음으로 흘러가면 좋겠다. 그래서 그도, 명랑한 나비가 되면 좋겠다.







*. 프레데리크 그로, 『걷기, 두 발로 사유하는 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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