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 초능력
3시 40분이 다 되어가는데 첫애가 집에 돌아오지 않았다. 원래 3시면 하교하고도 남는다. 오늘은 이상했다. 첫애에겐 휴대폰이 없기에 연락할 방법도 없었다. 꿀렁이는 배를 탄 것처럼 마음이 불안해졌다. 아이가 학교에서 조금만 늦어도 신경이 쓰이니 대범한 학부모가 되긴 글렀다. 마음속에서 랩이 줄줄 나왔다. '지금어디있니언제쯤집에오니오늘왜이렇게늦니' 안 되겠다 싶어 학교 쪽으로 나가려던 찰나, 첫애가 집에 도착했다.
내가 입을 뗄 새도 없이 첫애가 말을 쏟아냈다. "엄마! 집에 오는 길에 마음속으로 엄마의 말이 들렸어요! '지금어디있니언제쯤집에오니오늘왜이렇게늦니'라고 하더라고요." 헐 대박. 나는 어쩌다 보니 텔레파시를 습득한 것이었다. 휴대폰도 주지 않고 아이를 험한 세상으로 보낸 부모에겐 이런 능력이 달라붙기도 하나보다.
다른 사람에게도 텔레파시가 먹히는 걸까? 옆에 있던 둘째에게 실험해봤다. '너도 엄마 생각 들려?' 둘째 아이가 말했다. "들리긴 하는데요, 좀 무서워요……." 나는 마음 여린 둘째에게 다시는 텔레파시로 말을 걸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다음으론 남편에게 텔레파시를 쏴 보았다. 남편은 "난 당신 음성을 귀로 듣는 게 더 좋아요."라고 했다. 마지막으로 친한 친구에게 텔레파시를 실험해봤다. 친구는 휴대폰으로 대답했다. "그냥 카톡으로 하면 안 돼?"
나는 텔레파시 보유자가 되었다. 예쁜 쓰레기를 주운 느낌이다. 텔레파시라는 마이크를 나만 쥐고 있으니 혼자 떠드는 느낌이다. 스마트폰 없는 친구에게 카톡 보내는 꼴이랄까. 내게 텔레파시를 받은 사람들의 반응도 시큰둥했다. 학교에 있는 아이들에게 이걸로 말을 건다 한들 잔소리나 통보로밖에 느껴지지 않을 터였다. 텔레폰이 발명되기 전이라면 모를까, 현대 일상생활에 텔레파시가 낄 자리는 별로 없는 것 같았다. 기껏해야 나의 농축된 걱정이 파생한 해프닝에 불과해 보였다.
그러다 C가 생각났다. 학창 시절 때 단짝이었지만 살다 보니 연락이 끊긴 친구이다. SNS가 한창 생겨날 때 나는 그 애를 여러 플랫폼에서 열심히 검색했다. 아무 곳에서도 C를 찾을 수 없었다. 하지만 이제 나에겐 와이파이나 흥신소를 능가하는 텔레파시 능력이 있지 않은가. 설레는 마음으로 C에게 텔레파시를 보냈다.
'C야 안녕? 나 녹차인데 기억나? 우리 00학교에서 친했잖아. 이거 내가 보내는 텔레파시야. 넌 나의 코 푸는 소리에 질색했었지. 난 너의 곱슬머리가 귀여웠고. 살면서 네가 종종 생각났단다. 어떻게 지내는지 정말 궁금해. 내 전화번호는 010-****-****이야. 연락 기다릴게.'
떨렸다. 연락이 올까?
하루를 기다렸다. 아무 소식이 없었다. 용기를 내서 다시 텔레파시를 보냈다. 역시 답이 없었다. 덜컥 안 좋은 생각이 났다. 그 애가 세상에 없는 건 아닐까……. 아니, 아니다. 그냥 시간이 너무 오래 흘러서 날 잊었을 거다.
혹은, C가 날 기억해 냈을지도 모른다. 그저 지나치게 바빠서 당장 전화할 여유가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바쁜 C에게 나의 텔레파시는 언질도 없이 들이닥친 성가신 불청객이었겠지. 또는 나를 사칭한 보이스 피싱, 아니 마인드 피싱으로 오해했을 수도 있다. 오랜 세월 동안 연락 없던 친구가 뜬금없이 텔레파시로 접선하는 일은 흔하지 않으니까.
오래도록 끊어진 교류는 초능력으로도 쉽게 회복할 수 없나 보다. C의 생일, 설날, 추석, 크리스마스, 이렇게 1년에 네 번이라도 꾸준히 연락할걸. 뭐가 바쁘다고 그리 무심하게 살았을까. 어른이 되어보니 어린 시절의 우정이 그립고 아쉽다.
요즘은 사람이 더 고프다. 나는 초 내성적인 집순이이지만 부쩍 사람이 그립다. 직장 생활도 하지 않는 데다 연고 없는 지역에서 살다 보니 나의 인간관계는 매우 좁다. 몇 되지 않는 지인 네트워크마저도 코로나 때문에 거의 삭제되다시피 했다. 꾸준히 만나는 사람은 식구들뿐이다. 나는 가족들이라도 있지만 가족조차 못 만나는 사람도 있다. 우리 외할머니가 그렇다.
외할머니는 치매로 요양원에 계신다. 코로나 때문에 면회가 안되는 날이 많다. 그럴 땐 일주일에 한 번, 영상통화를 한다. 그 희귀한 영상통화 기회는 내 부모님과 큰 외삼촌이 나누어 이용하신다. 친정과 멀리 떨어져 사는 나는 영상 통화에 꼽사리 끼기도 어렵다. 하지만 이제 나에겐 요양원 담을 뛰어넘는 텔레파시 능력이 있지 않은가.
외할머니께 말을 걸 수 있다니. 가슴이 꿀렁거렸다. 나는 할머니께 텔레파시를 보냈다. '할머니! 제가 어릴 때 할머니가 만들어 주신 호박볶음은 진짜 부드럽고 맛있었어요.'
저게 끝이었다. 눈물이 너무 나와서 마음으로도 말할 수 없었다. 나는 어린아이처럼 훌쩍 훌쩍 오래 울었다.
할머니 표 호박볶음은 달큼하고 짭짤했다. 그릇 아래엔 살구빛 국물이 자작하게 고여 있었다. 푹 익은 호박볶음을 한 숟갈 떠서 밥에 얹은 후 숟가락의 불룩한 부분으로 슥 으깨면 연두부가 으스러지는 것처럼 사르르 녹았다. 밥알 속에 소스처럼 스민 그 호박볶음을 밥과 함께 푹 떠먹는 맛, 그 맛이 내 입과 마음속에 남긴 감각은 문자의 조합으로는 표현할 수 없다. 할머니는 나에게 호박볶음처럼 부드러운 사람이었다. 호박볶음처럼 자신을 가족들에게 으깨어 나눠주신 분이었다. 나를 반가워해 주고, 나에게 웃어준 사람이었다. 내 주위에 그런 어른은 드물었다.
자녀든 옛 친구든 할머니든, 사랑으로 얽힌 사람들과는 애가 타는 감정이 있다. 자녀가 안전하게 돌아오면 좋겠다. 친구를 다시 만나고 싶다. 외할머니와의 이별이 다가온다는 건 생각도 하기 싫다.
한편, 요즘 신경 쓰이는 일 중 하나는 미얀마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폭력의 소식으로 마음이 무겁다. 벌써 600명 이상 사망했다. 두 살짜리와 네 살짜리 아이도 납치당했다. 청소년들이 조준 사격으로 숨졌다. 미얀마인들의 자녀는 안전하게 집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있다. 다시 만날 수 없는 친구가 늘어나고 있다. 완력에 의한 이별이 계속되고 있다. 슬픈 사실은, 지금으로선 미얀마 군부의 쿠데타가 실패로 돌아갈 가능성이 그리 높지 않다는 점이다.
나는 미덥지 못한 텔레파시에게 한 번 더 기회를 주기로 했다. 미얀마 군부 최고사령관인 민 아웅 흘라잉에게 텔레파시로 질책을 하는 거다. '시민을 죽이지 마라. 독재를 멈춰라. 그렇지 않으면 반드시 대가를 치를 것이다.' 미얀마어 번역기에 통과시킨 저 문장을 독재자에게 텔레파시로 쐈다. 먹고 잠자는 시간 외엔 쉬지 않고 7일 동안 최선을 다해 경고 텔레파시를 발사했다.
그리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에게 정신 쇠약이 왔다거나 환청이 들린다는 뉴스는 없었다. 그가 대국민 사과를 한다거나 쿠데타를 철회한다는 소식도 들리지 않았다. 최고사령관은 오지게 못 들은 척하고 있었다.
성경에 나오는 '부자와 나사로'의 이야기가 생각난다. 부자는 호화스럽게 살았지만 자기 집 앞의 거지 나사로에겐 자비를 베풀 줄 몰랐다. 훗날 나사로는 죽어서 천국에 갔고 부자는 지옥으로 갔다. 부자는, 나사로를 안고 있는 아브라함에게 간곡히 부탁했다. "제발 부탁이니 나사로를 내 형제들에게 보내서 지옥에 오지 않게 해주십시오. 만약 죽었다가 살아난 사람이 그들에게 가면 그들이 회개할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부자에게 대답했다. "그들에겐 구약 성경이 있다. 그들이 거기 적힌 말을 듣지 않는다면 죽었다 살아난 사람이 하는 말도 듣지 않을 것이다."*
이미 주어진 평범한 책망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사람은, 텔레파시가 아니라 텔레파시 할아버지가 들이닥쳐도 뉘우치지 못한다. 마음이 너무 딱딱해서 기적도 통하지 않는다. 나는 그 날로 텔레파시를 장롱에 처박았다. 그리고 하나님께 기도했다. 온갖 기적과 초능력을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몰아 주시기를.
*. 누가복음 16:19~31 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