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3호가 리모델링 중이다. 우리 집 천정과 맞닿은 집이다. 어젠 시공업자분들이 베란다 새시를 모두 뜯었다. 오늘은 집안에 달라붙어 있는 것들을 박박 긁어냈다. 몇 알의 밥풀밖에 남지 않은 밥그릇을 필사적으로 긁어내느라 쇳소리를 내는 배고픈 숟가락처럼. 윗집은 이틀 사이에 서랍이 빠진 서랍장처럼 변했다. 깨끗하게 뚫린 사각 공간에서 몇 명의 노동자들이 바쁘게 움직였다. 그들의 주요 도구는 전동드릴이다. 드릴이 내지르는 소음은 내 두개골에 구멍을 뚫으려는 무시무시한 드릴 비트처럼 위협적이다. 3M에서 나온 오렌지색 귀마개를 나의 외이도로 다급하게 쑤셔 넣었지만 아무 효과도 없었다.
리모델링의 아우성이 이러할진대 내가 살고 있는 아파트가 지어지던 땐 얼마나 시끄러웠을까. 이 집과 내가 쓰는 컴퓨터, 지금 앉아 있는 의자, 없으면 생활이 불가능할 것 같은 세탁기 등 나를 둘러싼 공간들과 물건들은 천천 만만의 데시벨을 토하며 생겨났을 테다. 소리가 쓰레기처럼 누적되고 플라스틱처럼 썩지 않는다면 지구는 100개로도 모자라겠지.
한편 나는 분만실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다. 내 물건들은 외딴 시골의 공장이나 먼 나라에서 태어났다. 내가 거쳐갔던 모든 전셋집들의 건설 현장엔 내가 없었다. 탄생의 비명은 그곳의 흙과 나무와 야생동물과 노동자들이 n 분의 1로 덤터기 썼다. 지구의 귀가 퍽 따가웠을 거다. 덕분에 나는 고요한 집에서 컴퓨터와 의자와 세탁기를 품위 있게 누렸다(윗층의 리모델링 전까진).
내 두개골이 아닌 다른 이의 머리뼈를 굉음으로 타격하여 내가 쓸 물건을 받아쓰는 일은 황송하고 미안하다. 하지만 이 편리하고 얌체 같은 생활을 당장 그만둘 수는 없다. 오늘도 난 남편의 바지와 큰애의 반양말과 막내의 우산과 내가 쓸 물조리개를 주문했다. 꼭 필요한 물건이었다. 남편이 입던 바지는 앞뒤로 허옇게 닳았고, 막내가 쓰던 우산 손잡이는 부서졌고, 큰애의 하나밖에 없는 반양말은 낡았고, 나는 물조리개 없이 한 달간 식물을 돌봤다.
무언가가 야단스럽게 생겨난다는 이유로 그 제작 과정을 다짜고짜 밉볼 수는 없다. 세상에 시끄럽게 등장하는 건 사람도 마찬가지니까(응애 응애). 그래서 203호의 드릴 소리를 차마 미워할 수 없다. 내가 축적한 소음들도 만만치 않을 테니 시끄럽다고 불평할 양심도 없다. 그러나 내 정수리로 쏟아지는 음파의 세기는 너무 지나치다. 달팽이관이 파괴될 것 같다. 몸 전체와 일상도 다 박살 날 것 같다. 마음엔 온갖 부정적인 감정이 부글댄다. 화가 난다. 돌 것 같다.
나는 자칭 미니멀리스트다. 물건을 살 땐 두 가지를 고려한다. 첫째, 이 물건이 나에게 꼭 필요한가. 둘째, 이 물건을 놔둘 공간이 있는가. 여기에 세 번째 요소를 추가해야겠다. 셋째, 이 물건이 만들어질 때 발생하는 소음을 내 귀에 전부 담아야 한다 해도 이 물건을 사겠는가.
물건을 사기 전엔 보통 한 달 이상 고민하는 편이었다. 앞으론 그 기간이 좀 더 길어질지도 모르겠다. 음소거된 존재는 될 수 없겠지만 할 수 있는 한 조용한 존재이고 싶다. 누군가의 청력을 나의 쾌적한 생활을 위해 함부로 고갈시키지 않도록 조심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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