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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건을 팔기 시작했다. 다시.

by 녹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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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그린 그림을 상품화했다. 핸드폰 케이스, 에코백, 노트 등의 물건에 그림을 인쇄해서 제작해 주는 마플샵이라는 사이트에 둥지를 틀었다. 내 역할은 마플샵이 제공하는 상품의 겉면에 나의 그림을 몇 번의 클릭으로 덧입히는 것이다. 판매와 제작은 마플샵이 담당하며 판매될 때마다 나에게 극소량의 커미션이 지급된다. 내 그림이 접목된 상품을 선보일 수 있어서 좋다. 하지만 그 물건이 누군가에게 감정적 소비, 충동구매, 또는 '응원적 소비'를 불러일으키는 건 바라지 않는다.


이런 일이 처음은 아니다. 지금과 똑같은 방식은 아니었지만, 내 그림이 들어간 상품을 제작해서 판매했던 때가 있었다. 그땐 전 과정을 내 손으로 처리했다. 개인사업자를 내서 판매 사이트를 직접 관리하고, 재고도 내가 관리하고, 디자인도 내가 하고, 물건 제작도 내가 하고, 촬영과 포토샵 작업도 내가 하고, 사진 업데이트도 내가 하고, 홍보도 내가 하고, 송장도 내가 쓰고, 택배 포장도 내가 하고, 발송도 내가 하고, 영수증도 내가 붙이고, 세금 신고도 내가 했다. 동시에 유아 둘을 내 손으로 키우며 대부분의 집안일도 겸했다. 좁은 집안 곳곳에 상품 더미와 택배 박스, 에어캡을 쌓아놓고 살다가 몇 년 뒤 폐업신고를 했다.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단지 힘들다는 이유로 그 일을 접은 건 아니었다.


어느 날 제작한 상품에 문제가 생겼다. 그림 아래에 수백 개의 글자가 들어간 디자인이었는데 뒤늦게 오타를 발견한 것이다. 딱 한 자의 선명한 오타. 그러나 이미 많은 사람들에게 그 물건을 발송한 뒤였다.


오타를 발견하자마자 판매 사이트에 공지를 올렸다. "00제품에서 뒤늦게 오타를 발견했습니다. 해당 상품은 판매 중지되었으며 이미 구매하신 분들께는 즉시 환불을 진행해드리겠습니다. 디자인을 정정하여 새 제품을 보내드려야 마땅하지만 개인적으로 그럴 여건이 못 되어 정말 죄송합니다. 흠이 있는 제품을 받아보시게 한 점 다시 한번 사죄드립니다." 같은 내용으로 구매자들에게 문자 메시지를 보냈다. 뒤이어 계좌이체 창을 띄워놓고 환불을 시작했다. 키보드의 숫자 자판을 누르고 눌렀다. 모든 수습을 마치고 나니 날이 저물어 있었다.


어둠과 함께 두 가지가 몰려왔다. 창피함과 문자메시지였다. 수차례 검수했으면서 왜 저 글자를 놓쳤을까. 왜 더 꼼꼼하지 못했을까. 한편 구매자들의 문자는 관대했다. "오타 있는지 몰랐어요." "환불받는 게 미안하네요." "그래도 물건 쓰는 데는 지장 없어서 그냥 쓸 거예요." 버리지 않고 그냥 쓰겠다니 더욱 창피했다. 내가 만든 물건의 흠집은 곧 나의 흠집이다. 누군가의 집에 나의 허물이 한자리 차지하고 있을 걸 상상하니 기가 막혔다. 장사 참 잘 하는 노릇이었다.


나를 난감하게 하는 건 또 있었다. 나를 아끼던 오프라인 지인들의 구매력이었다. 그들은 내가 홍보한 적 없는 나의 온라인 쇼핑몰을 자발적으로 찾아냈다. 단골손님까지 되었다. 그런데 내가 취급한 물건은 생필품이 아니었다. 금세 닳아서 재구매 해야 하는 종류가 아니었다. 하지만 그들은 꾸준히 내 물건을 샀다. 아니 사'주'었다. 오타가 찍힌 그 물건마저도.


"그 상품은 오타가 찍혀서 판매를 중지했고, 구매자들에게도 모두 환불 처리가 끝났어요"라고 설명했지만 지인 A는 상관없다고 했다. 꼭 필요하다며 간곡히 졸랐다. 결국 나는 조건을 걸었다. 물건은 드리겠지만 돈은 받지 않겠다고. 그러나 A는 나의 허물을 건네받은 뒤 내 가방 위에 2만 원을 던지고 쏜살같이 도망갔다.


A는 나를 아꼈다. 고맙고 마음 따뜻한 지인이 아닐 수 없다. 한편 나는 내 물건이 가치있게 쓰이길 바랐다. 내가 만든 상품의 하자에 상식적인 잣대조차 들이대지 않거나, 그 상품이 꼭 필요하지도 않는데도 사들이는 건 씁쓸했다. 나에 대한 지지를 내 물건을 구매하는 걸로 표현하는 지인에게 복잡한 감정을 느꼈다. 그건 그의 돈을 부질없이 낭비하게 만드는 것, 그의 공간을 쓸데없이 비좁게 만드는 것, 지구에 쓰레기를 보태는 것, 내 그림의 가치를 쓸쓸하게 만드는 것, 내가 떳떳하지 못하게 되는 것, 내가 민폐 인간이 되는 것과 맞닿은 것만 같았다.


만일 내가 판매했던 게 쌀이라던가 두루마리 휴지, 주방 세제 등이었다면 지인들의 지속적인 '응원적 구매'를 한결 편하게 받아들였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내 상품들은 장식품에 가까웠다. 내가 판매하는 물건이었지만 나조차도 한두 개면 족한 아이템이었다. 그런 물건을 끊임없이 사 주는 사람들에게 미안하고 무안했다. 팔기 위해 장사를 한 건 맞다. 심지어 많이 팔린다 해도 입에 풀칠할까 말까 한 일이었다. 누군가가 나의 작품을 선택해 주는 것은 감사한 일이었다. 그러면서도 새 주문이 들어오면 근심이 됐다. 나를 응원해 주려는 목적은 아닐까? 상품이 구매자의 집에서 예쁜 쓰레기가 되진 않을까? 심심풀이 구매는 아닐까? 충동구매는 아닐까? 이런 정신머리로 장사를 했다. 내 두뇌는 돈을 못 버는 쪽으로 최적화된 게 확실하다. 결국 폐업을 했다. 폐업 이유 중엔 '응원 구매'의 불편함도 한 줌 포함돼 있었다. 난 정말 답이 없다.


답도 없는데 또다시 물건을 팔기로 했다. 현실에 무능한 편이지만 현실감각이 없지는 않아서 오랫동안 쉬었던 경제활동에 복귀했다. 다행인 건 마플샵엔 장식품 뿐만 아니라 생활용품도 다양해서 내 상품이 예쁜 쓰레기가 될 위험이 조금 줄었다. 응원 구매는 일찍이 차단했다. 몇 년 전의 폐업 이후로 온라인에선 실명을 쓰지 않는 지혜를 실천 중이다. 이제 지인들은 인터넷에서 나의 새 가게뿐 아니라 내 존재도 찾을 수 없다. 지인과 일가친척 찬스는 첫 번째 장사로 충분했다. 그렇기에 소위 말하는 오픈빨도 없다. 주문 내역 화면에는 뭐가 참 없다. 아주 깨끗하다. 미니멀라이프를 좋아하는 내 취향에 딱이다. 내 그림에 떳떳하고 생계유지에도 진심이지만 온라인 가게에 손님이 없는 게 초조하진 않다. 진심으로 내 그림을 좋아해 주는 사람, 내 그림을 곁에 두고서 즐겁게 봐줄 사람이 생길 때까지 성실히 그려봐야겠다는 생각이다. 내 작품에 자신만만한 건 아니고 그저 두뇌가 낭만적이라 그렇다. 난 진짜 답이 없다.


나는 예술가도 아니고 디자이너도 아니다. 무無쓸모와 무無실용 속에서도 존재 가치를 발휘하는 예술, 쓸모와 실용을 갖춰야만 존재 가치 있는 디자인, 그 둘 사이 어디쯤에서 그림을 그리며 상품을 선보인다. 실용의 영역을 망각한 그림을 이용하여 쓸모 있어야 할 물건을 디자인한다. 물건을 함부로 구매하지 않는 미니멀리스트인 내가, 다른 사람에게 물건을 판매한다. 부디 내 상품 아래에 달린 주문 버튼이 많은 고민 끝에 눌러지길, 쓸데없이 판매되지 않길, 마침내 판매된다면 구매자의 눈과 손을 오래도록 흡족하게 해 주길 소원한다.






녹차의 일러스트 샵 ▼

https://marpple.shop/kr/nokch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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