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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어때

by 녹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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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욕이 없다. 도서관에서 책을 잔뜩 빌려왔는데 펼쳐 볼 마음이 없다. 산책도 효과가 없다. 아침 나무 사이를 거닐 땐 기분이 좋았지만 집에 돌아오니 다시 만사가 귀찮아졌다. 급성 슬럼프의 이유는 그림 때문이다. 그림이 안 풀린다. 뭘 어떻게 그려야 할지 모르겠다. 창의력도 없고 지구력도 없다. 하얀 종이가 싫증 나고 의자에 붙은 엉덩이가 들썩거린다. 이 무기력은 어제부터 시작되었다. 정기적으로 찾아오는 '창작의 무기력'이다. 단골손님이지만 익숙해지지가 않는다.


그 와중에 집안일은 할 만하다(물론 재미는 없다). 물론 내가 집안일이 하기 싫다고 한들 빠져나갈 구멍은 없다. 집안일을 놔버리면 식구들이 굶을 것이고, 입을 옷이 없어질 테고, 화장실에 지린내가 차오를 것이다. 그러니 집안일은 내 마음 상태가 어떻든 나와 식구들의 생존과 쾌적한 일상을 유지시키려면 닥치고 해야 하는 근로다. 다행히 내 속의 세포엔 집안일의 습관이 배어있다. 의지를 짜낼 필요가 없다. 영혼 없는 동작이지만 집안일 앞에서는 몸이 기계적으로 움직인다. 창의력을 요하는 일도 아니니 골치 아플 일도 없다. 무심히 몸을 가동하다 보면 집안이 단정해진다.


그림은 그렇질 못하다. 머리를 써야 한다. 해 아래에 새것이라곤 없기 때문에 머리를 많이 써야 한다. 그래서 최소한, 게으르고 뻔한 그림이 되지 않아야 한다. 나만의 스타일을 구축했다면 중간을 넘긴 것이다. 보는 이의 눈과 마음까지 붙잡는다면 성공이다. 내 그림은 '최소 자격'을 넘어서기 위해 버둥거리고 있다. 몇 번을 엎어가며 그린다. 수없이 지워가며 그린다. 셀 수 없이 덧칠한다. 완성된 그림을 며칠 후에 다시 보면 그렇게 거지 같을 수가 없다. 참지 못하고 처음부터 다시 고쳐 그린다. '시각 공해는 만들지 말자'라고 다짐한다.


그림을 그만둔다고 해서 생존이 위태로워지는 것은 아니다. 나의 그림 작업은 대가 없는 노동에 불과하니까. 그림이라는 영역에 오래 머물렀지만 한 우물을 파지 못한 탓인지 실력이 없는 탓인지 아직도 안정적인 자리를 잡지 못했다. 내 그림을 찾는 이는 거의 없고 나조차도 내 그림이 맘에 들지 않는다. 그리지 않는다 한들 문제 될 게 없다. 그래서 의욕이 푹푹 꺼진다. 이런 걸 뭐 하러 그리나 싶다.


그럼에도 그림을 놓지 못하는 건 희망과 습관, 무無대안, 그리고 재미 때문이다. '계속 그리다 보면 1픽셀만큼은 나아지겠지, 그래서 언젠간 내 그림이 누군가에게 감동을 주는 날도 오겠지, 세상에서 쓰임도 받겠지'라는 희망. 작업이 잘 풀리든 안 풀리든, 오랫동안 그려온 탓에 손가락에 붙은 그림 습관. 잘하고 못하고를 떠나 이것 말곤 할 줄 아는 게 없는 무無대안. 그림에 대한 엄살을 씨부렁거리면서도 어쩔 수 없이 그림이 제일 재밌는 나.


의욕이 바싹 마른 나에게도 그리고 싶은 게 남아 있을까. 사람들이 보고 싶어 하는 그림은 무엇일까. 내 마음과 사람들의 눈 속 깊이 숨겨져 있는 색감을 찾아 포토샵의 스포이트 툴로 콕 찍어서 훔치고 싶다.


그나저나 이 기운 빠지는 에세이엔 어떤 그림이 어울리려나. 내용에 상관없이 아무거나 그려봐야겠다. 내가 좋아하는 나무와 새와 꽃을 귀엽게 그려봐야겠다. 뭐 어때, 어차피 내 에세이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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