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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년 만이다

by 녹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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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을 차려보니 입안이 불편하다. 혓바늘이 돋고 잇몸도 살짝 부었다. 머리도 무겁다. 지난 5일 동안 다섯 세트의 이모티콘을 제안해서 피곤이 쌓였나 보다. 이모티콘 한 세트엔 서른두 개의 이모티콘이 들어간다. 5일 동안 160개의 이모티콘을 그린 셈이다. 예전에 미승인 받았던 걸 수정한 케이스도 있지만 새롭게 그린 게 더 많다. 몸에는 무리였지만 뭣에 홀린 듯 재밌게 그렸다.


마지막으로 이모티콘을 제안했던 건 작년 7월 24일이었다. 그날에 64번째 미승인, 즉 불합격 예순네 번을 채웠다. 번번이 휴지조각이 돼서 돌아오는 나의 그림들에 맥이 빠졌다. 이모티콘 도전에 전의를 상실한 나는 그 후부터 다른 그림을 그렸다. 못났든 잘났든 내 그림이 공중분해되지 않는 걸 보고 싶었다. 그림 에세이 작업은 그래서 좋았다. 해변 모래 위가 아닌 굳기 직전의 시멘트 위에 발자국을 남기는 것 같았으니까.


그러다 얼추 1년 만인 일주일 전, 다시 이모티콘을 그렸다다. 계획했던 일은 아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복귀는 무기력증에서 비롯됐다.


8일 전, 그림이 막막해지는 무기력증에 걸렸다. 내 머리는 최후의 밀가루 부스러기까지 남김없이 털린 말끔한 밀가루 포대가 됐다. 그림에 대한 아이디어가 한 알갱이도 떠오르지 않았다. 답답한 마음을 글로도 남겼다(여기). 그 글을 쓰고서 하나님께 기도했다. 무엇을 어떻게 그려야 할지 알 수 있는 지혜를 주시길, 보는 이들의 눈과 마음이 쉼을 얻는 그림을 그리게 해 주시길, 그리는 나 자신에게도 기쁨이 되는 작업이 되기를 간구했다.


나의 신은 내가 원하는 것을 얻어내기 위한 수단으로 존재하지 않으신다. 그분은 기계적으로 뭔가를 제공하는 자동판매기가 아니다. 살아있는 인격이시다. 모든 부모의 원형이시며 나의 양육자이시다. 비일관적이고 조건적이며 불완전한 땅의 부모들과는 다르다. 영원히 동일하며 무조건적이며 완전한 사랑으로 귀 기울여주시는 분이다. 그래서 그분은 내가 욕심으로 잘못 구할 땐 침묵하신다. 뱀을 구할 땐 주지 않으신다. 하지만 지혜와 성령을 구할 땐 넘치게 주시며 내 모든 말과 신음을 놓치지 않으신다.


"지혜가 부족한 사람이 있으면 하나님께 구하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자비로우셔서 모든 사람에게 나눠 주시는 것을 즐거워하십니다. 따라서 여러분이 필요로 하는 지혜를 주실 것입니다."(쉬운 성경/야고보서 1:5)


우주의 창조자는 우주보다 더 큰 귀를 갖고 계시다. 이번에도 그분은 나의 기도를 들으셨다. 뭘 어떻게 그려야 할지 떠오르게 해주셨다.


그 후 이틀 동안 일러스트 9개를 그렸다. 예전에 그렸던 그림이 맘에 들지 않았는데 그걸 지우고 새로 작업한 것이다. 그 그림이 들어간 에세이들로 새로운 브런치북을 출간했다(여기). 9개의 일러스트를 그리며 이모티콘에 대한 아이디어도 불쑥 떠올랐다. 1년 만의 이모티콘 작업은 그렇게 재개되었다.


1년이라는 시간이 불합격의 충격을 다 거둬가진 않았다. 약간 침식해갔을 뿐이다. 민들레나 씀바귀보다 더 쓴 탈락의 맛이 살짝 싱거워지는 틈을 타 나는 거기로 또 뛰어들었다. 적어도 이젠 내가 달성했던 64번의 불합격을 무능함이라고만 정의 내리진 않게 됐다. 양혜원의 글에서처럼 나는 "내게 주어진 인생에 성실했다고, 내 달란트를 땅에 묻는 일은 하지 않았"[1]다고 말할 수 있다. "지금의 나를 만들어 준 과거의 경험들을 유감스러워하지도 않"을[1] 것이다.


이번엔 탈락을 몇 번이나 견딜 수 있을까. 65번? 66번? 어떤 그림이 선택될지, 얼마나 낙제를 견딜 수 있을지는 나도 모른다. 그저 그리고 싶은 마음이 충전된 것으로 감사한다. 에너지가 채워졌으니 달려보자. 과속을 주의하며.








1. 양혜원, 『교회 언니의 페미니즘 수업』, 비아토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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