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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충제

by 녹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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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모티콘을 계속 제작하고 있다. 최근 3주 동안 여섯 세트의 이모티콘을 제안했다. 그중 두 개는 탈락했고 네 개는 심사 중이다. 심사 중인 것들도 모조리 탈락할지도 모르겠다. 그런 우울한 생각을 떨쳐버리기 위해 새로운 이모티콘을 구상하는 데 집중한다. 아니면 지금처럼 글을 쓰거나.


탈락 메일의 말투는 매우 점잖다. 탈락을 알리는 우아한 어조와 그것이 내게 주는 충격을 상차림으로 비유하자면 다음과 같다.


아침밥을 정성껏 차려줬더니 큰애가 이렇게 말했다. "어머니, 저에게 아침을 차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메뉴를 빠짐없이 검토하였으나 아쉽게도 제 입에 넣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그러더니 큰애는 아침밥을 쓰레기통에 넣어 버렸다. 나는 다소 충격받았으나 심기일전하여 점심을 차렸다. 점심상을 훑어본 둘째가 입을 열었다. "어머니, 저의 내면에서 많은 고민이 있었지만 제가 먹지는 못할 것 같습니다. 어렵게 차려 주셨지만 긍정적인 답변드리지 못하는 점 양해 말씀드립니다." 둘째도 점심을 쓰레기통에 넣었다. 오후 내내 패닉 상태에 빠져있던 나는 다섯시쯤에야 겨우 정신을 차리고 저녁을 열심히 차렸다. 완성된 저녁 식탁을 본 남편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여보, 나는 당신의 모든 요리를 존중해요. 나를 향한 깊은 애정에도 감사하고요. 당신의 요리를 소화할 수 있는 내가 되도록 노력할게요." 알쏭달쏭 한 말을 마친 남편은, 역시, 나의 요리를 쓰레기통에 탈탈 털어버렸다.


위의 우화는, 애써 그린 이모티콘에 대한 탈락 통보를 받은 내 심정과 상황을 잘 담고 있다. 탈락 메일엔 예의 바른 문장이 가득하지만 그래서 묘하게 괴리감과 기괴함이 느껴진다. 사포 같은 결과를 양털 같은 단어로 전달하는 이유는 탈락의 비애를 완충해 주기 위함일 테다. 그러나 고슴도치나 선인장을 이기는 에어캡은 없다. 탈락 메일의 완곡어법은 불합격의 뾰족함을 둥글리지 못한다. 그래서 탈락 메일을 받을 때마다 마음이 따끔거린다. 똑같은 메일을 71번이나 받아봤지만 받을 때마다 그렇다. 익숙해지지가 않는다. 나는 불일치의 문학이자 그로테스크한 스팸 메일을 쉽게 삭일 만큼의 대인배가 못 된다.


불합격 메일을 원망하려고 이런 글을 쓰는 건 아니다. 이모티콘 플랫폼의 좁은 문에 대해 험담을 하는 것도 아니다. 내일 당장 72번째 불합격 통보를 받을지도 모르고, 그때 낙심하지 않기 위해 내 마음을 준비시키는 중일뿐이다. 빨간색 미승인 글자를 보면 늘 그랬듯 눈도 마음도 따가울 거다. 하지만 습관처럼 밥을 차리듯 그림도 습관처럼 그리는 수밖에 없다. 때론 꾸역꾸역, 때론 즐겁게.


한편, 내가 차린 밥상은 현실 세계에서 보이콧 된 적이 없다. 식구들은 내가 차려주는 족족 맛있게 먹어준다. 매일 세 번씩이나 상차림 합격 통보를 받는 셈이다. 이 무수한 합격들이 다른 영역에서의 탈락에 대한 충격을 흡수해 주는지도 모르겠다. 나를 받아주고 지지해주는 이들의 사랑 덕에 까끌거리는 길을 걸어갈 동력을 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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