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디지털 노매드이며 재택근무자이고 프리랜서이다. 모두 퍽 낭만적인 단어이다. 내 현실이 낭만적이지 않은 게 문제이지만.
나는 인터넷과 컴퓨터만 있으면 어디서든 근무할 수 있는 일을 업으로 삼고 있다. 주로 일러스트나 이모티콘을 제작한다. 그러나 노트북 하나를 들고 세계를 누비는 디지털 노매드의 이미지와 나의 삶은 거리가 멀다. 코로나 탓도 있지만 내가 재택에 뿌리박은 근무자이기 때문이다.
'재택' 근무보다는 '가택연금' 근무라는 표현이 내겐 더 적절하겠다. 아이들 양육과 집안일을 겸하기 위해 집에서 할 수 있는 일을 선택했다. 양육과 살림과 그림이라는 세 가지 굴렁쇠를 집 안에서 굴린다. 한 몸으로 쓰리잡을 뛰고 있다. 눈 뜨자마자 출근이고 눈을 감아야 비로소 퇴근이다. 주로 4시 반에 기상하고 11시 안팎으로 잠자리에 든다. 매일 새벽 출근에 야근인 셈이다. 이러니 집에서 벗어나기가 어렵다. 해외는 고사하고 국내 여행도 어려운 노매드 되겠다. 애들 방학 후엔 집 앞 산책도 못하고 있다.
또한 나는 프리랜서이다. 꾸준한 일감이 없다는 소리다. 일감을 따내기 위해 경쟁의 바다에 매일 입수해야 한다. 이름에 프리가 들어간다고 프리하게 풀어졌다간 굶어죽기 딱 좋아서 열심히 발장구를 친다. 매여있는 회사나 일정 같은 게 없기에 내가 스스로를 독려한다.
게다가 지금은 아이들 방학이다. 내 근무 환경은 더 극한 상황이 됐다. 틈날 때마다 책상에 앉지만 내 뒤에선 리코더 소리와 실로폰 소리가 울려 퍼진다. 점 하나를 찍으면 "엄마 심심해요.", 선 하나를 그으면 "엄마 뭐 먹을 거 없어요?", 색 하나를 채우면 "엄마 이거 모르겠어요."라는 목소리도 들린다. 막내와 나는 방을 공유한다. 방바닥엔 부러진 연필심, 색종이 조각, 지우개 똥, 벗은 양말, 레고 조각 등이 흩뿌려져 있다. 집중해서 일하기 딱 좋은 작업실이 아닐 수 없다.
어제는 오전 내내 집안일을 하고 장을 봤다. 식구들 점심 먹은 걸 치운 후에야 그림 그릴 시간이 났다. 책상 앞에서 작업을 시작하려는 찰나, 눈앞이 어지러우면서 몸의 힘이 빠졌다. 생리가 끝나갈 무렵이라 빈혈기가 올라왔고 아이들 방학 이후 많은 일을 하느라 몸에 무리가 온 것도 같았다. 당장 컴퓨터를 끄고 자리에 누웠다. 눈을 감았다 뜨니 1시간이 흘러 있었다. 어지럼증은 가셨는데 심한 체기가 올라왔다. 점심 먹은 걸 소화시키기 전에 누워버려서 그랬나 보다. 입안에 끈적한 침이 쉼 없이 고였다. 어떻게 고쳐 앉아도 몸이 몹시 괴로웠다. 남편이 사 온 소화제를 먹고 저녁은 굶었다. 밤이 되어서야 속이 편해졌다. 어지럼증과 급체 덕에 반나절 넘게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참 오랜만의 쉼이었다.
퇴근도 휴가도 내 맘대로 쓸 수 있는 노매드·재택근무자·프리랜서이건만 쉬는 게 왜 이리 어려울까. 열심히 사는 것 안에는 열심히 쉬는 것도 포함되는 걸 참 잘도 까먹는다.
쉬지 않고 달리기만 하면 내게 주어진 복을 짐으로 변질시키게 된다. 나의 사랑하는 두 자녀, 화목한 가정, 집에서도 일할 수 있는 기회, 좋아하는 일을 업으로 삼은 것은 모두 커다란 선물이다. 이 선물들을 의무나 책임으로만 치우쳐 바라보면 몸과 마음이 팍팍해진다. 선물을 선물답게 누리며 살고 싶다.
오늘은 주일이다. 주일엔 그림을 그리지 않는다. 일곱째 날엔 안식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 위해서이다. 하지만 때로는 주일에도 충분히 쉬지 못했던 것 같다. 오늘도 그간 못 읽었던 책을 '전투적인 자세'로 읽을 계획이었으니….
"사람은 자기 마음에 앞날을 계획하지만, 그 걸음을 정하시는 이는 여호와이시다"(쉬운 성경/잠언 16:9) 아등바등 산다고 모든 것이 열매가 되진 않는다. 쉬어야 할 때 쉬지 않으면 몸만 상한다. 내가 급체 때문에 부엌일을 못 하니 식구들이 알아서 밥을 챙겨 먹었다. 내가 쉬어도 세상은 잘 돌아간다. 나는 쉬어도 괜찮고 쉬어야만 한다. 모든 조급함과 인간적인 생각들을 내려놓고 주일마다 더욱 깊이 쉬어야겠다.
이 반성문의 마침표를 찍고 나면 읽고 싶었던 책을 '대충' '몇 장만' 읽을 거다. 그리고 남편과 수다를 떨다가 9시에 잠들어야겠다.
(위 그림은 7월 말에 그렸던 그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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