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모티콘 작업을 계속하고 있다. 어제는 88번째 미승인을 받았다. 이토록 근면 성실하게 미승인을 수집 중이니 어찌 장하지 아니한가.
내 생애 첫 수집은 초등학교 때의 우표 수집이었다. 우표의 가치나 의미엔 관심 없었다. 편지 봉투를 물에 불려서 우표를 상처 없이 떼내고, 젖은 우표를 바싹 말려서 앨범에 반듯하게 넣고, 특이한 우표를 구매하는 등 '모으는 행위' 자체에 몰입했다. 열렬한 몰입은 아니었던지라 얼마 뒤 시들해졌다. 어린 시절 취미의 잔재는 친정집 책장에 박제된 상태다. 이제 우표 앨범은 우표 대신 먼지를 수집 중이다. 우표든 먼지든 구미가 당기지 않는다. 나에게 아무 의미 없는 것들이니까. 우표 앨범을 버려도 된다고 부모님께 말씀드렸지만 당신들은 아까워서 못 버리시겠단다.
어제 발생한 미승인 이모티콘은 버릴 생각이다. 수정해서 다시 제안할 계획이 없다. 보통은 미승인이 되어도 두세 번씩 고쳐서 다시 제안해 보는 편이다. 하지만 이번 이모티콘은 몇 가지 이유로 회생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다. 과감히 폐기하기로 했다.
내가 버리겠다고 한들 88이라는 숫자는 통계 표 위에 선명하게 찍혀있다. 내 의도와 상관없는 '미승인 수집'이 날마다 호황이다. 다행스럽게도 이 수집엔 의미가 있다. 산처럼 쌓인 미승인으로부터 이런저런 것들을 배우기 때문이다.
미승인을 수집하면서 내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걸 배운다. 뼈아프게 배운다. 골다공증이나 골절도 이만큼 아프진 않을 것이다. 미승인은 나의 현주소와 시시한 실력을 가감 없이 알려준다. 손이든 머리든 게으르게 굴렸다간 아무것도 결실하지 못한다는 뻔한 명제를 무시무시하게 가르쳐준다. 손가락, 팔꿈치, 허리, 어깨, 머리를 갈아 넣으면 개미만큼의 전진이 가능하다는 것도 배운다. 불합격을 이렇게 많이 얻어맞는데도 맞을 때마다 신선하게 아프다는 것도 배운다(맷집이라는 진짜 존재하긴 하는 걸까?). 불합격의 매운맛을 견디며 묵묵히 계속 그리는 법도 배운다. 안개처럼 휘발해버린 88번의 노력에 대한 미련을 버리는 법도 익힌다. 수업료가 악랄하긴 하지만 그래도 88번의 배움이 있었다. 내 땀방울이 아주 무가치한 것 만은 아니었다. 이 사실은 몇 마이크로그램 정도의 위안이 된다.
무엇보다 내가 할 수 있는 영역과 할 수 없는 영역을 배운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리는 일뿐이다. 내 손을 떠난 그림의 당락은 나의 바람이나 의지로 조종할 수 없다. "사람은 자기 마음에 앞날을 계획하지만, 그 걸음을 정하시는 이는 여호와 이시다."(쉬운 성경/ 잠언 16:9) 그러니 내가 할 수 있는 일에 최선을 다할 뿐이다. 일의 결과는 주님께 맡긴다. 하나님은 나의 좋은 목자이시다. 승인이든 미승인이든 결국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룰 것임을 믿는다.
내 의지로 조절할 수 있는 게 하나 더 있다. '미승인 학교'에서 자퇴하지 않는 것이다. 나는 초·중·고·대학교 어디에서도 자퇴한 적이 없다. 이번에도 결심해 본다. 최소한 미승인 100번을 채우기 전까진 자퇴생이 되지 않기로.
글을 맺으며 명시 하나를 옮겨본다.
"그림이 어렵다 하되 종이 안의 그림이로다
그리고 또 그리면 못 그릴리 없건마는
사람이 제 아니 그리고 그림만 어렵다 하더라."
-오마주 작가 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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