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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욕 없는 아침

by 녹차

의욕이 없다. 오랜만의 무기력이다. 곧 새해가 열리는데 설렘보다 막막함이 크다. 새해 계획도 없다. 계획대로 되는 게 없기 때문이다. 이모티콘 작업한 것들이 석 달 내내 미승인을 받았다. 총 37회 연속 불합격이다. 며칠 전엔 하루에만 9개의 미승인을 받았다. 충격이었다. 나는 센스도 없고 감도 떨어진다. 내세울 거라곤 꾸준함 밖에 없다. 그런데 삼 개월 동안 얻어맞았더니 성실도 풀이 죽는다. 몸이 닳도록 살았지만 돌아오는 게 좌절뿐이면 허망하다. 뭐 하러 열심히 살았나 싶은 못된 마음이 피어오른다.


뉴스에 오르내리는 소식도 성실하게 사는 사람들을 조롱한다. 온갖 꼼수와 거짓말로 직장을 거머쥐는 사람, 퇴직금으로 수십억을 받은 사람, 권력자였다는 이유로 무거운 벌을 탕감 받은 사람. 그들이 부럽지는 않다. 하지만 나의 성실함이 괜히 안쓰러워지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불합격 폭탄을 9개나 배달 받고 울적했지만 한두 시간 지나 충격에서 빠져나왔다. 내 능력을 초월하는 평화였다. 평소에 하나님께 기도했었다. 일이 잘 풀리지 않아도 너무 낙심하지 않게 해 달라고.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은 빠른 회복과 덤덤함을 선물로 주셨다. 자리에서 일어나 해야 할 일- 파 한 단 썰기, 밥하기, 장 보기, 빨래 개기, 애들 챙기기, 식물 돌보기-을 했다. 집안일은 내 손이 한 대로 정직하게 결과가 남는다. 이 노동은 가루가 되지 않는다. 즉각적인 결실까지 맺는다. 집이 밝아지고 냉장고가 풍족해지고 옷이 깨끗해진다. 하나님께서 이런 보람 하나를 남겨 주신 것에 감사했다. 집안일을 마친 후 책상에 앉았다. 그날 밤, 미승인 된 이모티콘 하나를 빠르게 수정하여 다시 제안했다.


어제는 가까운 학교에서 코로나 집단감염이 일어났다. 도내에서 역대 최대 확진자 수를 찍었다. 애들 학교에서 새벽부터 문자가 세 통이나 왔다. 가족 중에 확진자가 있는지 물어보며 바깥 활동을 자제해달라는 내용이었다.


한편 아이들은 이번 주부터 겨울 방학이다. 아이들과 한 달 동안 집콕할 생각을 하니 긴장이 된다. 그림 작업하고 집안일하면서 아이들의 심심함을 달래야 한다. 졸업과 입학을 앞둔 큰애에겐 챙겨야 할 일이 더 많다. 많은 일 앞에서 가슴이 답답해진다. 더구나 대부분의 일이 불가항력이다. 계속되는 불합격, 코앞에 온 전염병, 아이들의 심심함, 진로…. 집안일 외엔 내 손으로 해결할 수 있는 게 없다.


무기력한 아침에 습관대로 성경을 펼쳤다.


"임신한 여자가 아기를 낳는 듯한 고통을 겪었으나, 우리가 낳은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습니다. 우리는 세상을 구원할 아무런 일도 하지 못했고, 이 세상에 사람을 내보내지도 못했습니다. 주의 백성이 죽었으나 다시 살아날 것입니다. 그 시체들이 다시 일어날 것입니다. 먼지 가운데 누워 있는 사람들아, 일어나라, 그리고 기뻐하라. 이는 하나님의 생명의 빛이 무덤 속에서 잠자는 사람들에게 이슬같이 떨어질 것이기 때문이다."(쉬운성경/이사야 26:18~19)


무기력하고 무능력한 아침에 하나님은 생명을 주셨다. 이 하루를 살아 보라고 또 숨을 붙여 놓으셨다. 연명하는 하루가 아닌 이슬 같고 빛 같은 생명으로 살게 하실 것을 약속하신다. 주님의 새끼손가락에 나의 새끼손가락을 걸어야겠다. 오늘 치 숙제는 뭔가를 성취하고 해결하는 게 아닌가 보다. 안개 낀 하루를 목자의 손에 의지하여 한 땀 한 땀 걷는 걸로 족할지도 모르겠다.


하루를 완주한 후 동행해 주신 주님께 감사 기도를 드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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