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해의 마지막 날인 오늘은 이모티콘 작업을 쉬었다. 눈이 너무 피곤해서였다. 양 눈이 토끼처럼 빨개졌다. 눈을 너무 많이 썼나 보다. 이번 주엔 이모티콘 네 세트를 제안했다. 눈을 감고 있어도 안구가 뻑뻑하다. 덕분에 펜을 내려놓고 편안한 하루를 보냈다. 한 해를 정돈하는 마음으로 집안일을 하고 잠도 보충했다. 지인들과 포근한 연말 인사도 나누었다.
카카오에 이모티콘을 처음 도전한 건 2018년 4월이다. 그때부터 2020년 7월 말까지 70개의 이모티콘을 제안했다. 그중 미승인이 64개, 승인은 6개였다. 불합격을 연속 수십 번 받다가 슬럼프를 얻었다. 1년 가까이 이모티콘을 그리지 못했다.
길었던 슬럼프가 올해 6월에 끝났다. 2021년 6월 중순부터 12월까지 6개월 반 동안 75개의 이모티콘을 제안했다. 그중 66개는 미승인을 받았고 9개는 승인됐다. 어디 내놓을 성적은 못 된다. 하지만 나는 조금 전진했다.
탈락 메일을 열어보는 건 아직도 쉽지 않다. 몹시 쓰고 허망하다. 그러나 탈락의 슬픔이 슬럼프로 직결되진 않는다. 1년간의 슬럼프를 통과하는 동안 불합격을 견디는 면역력이 조금 불어났나 보다. 미승인을 참아내는 힘이 좀 더 세졌고 탈락의 우울을 약간 더 빨리 털어버리게 됐다. 실패를 조금 더 잘 버티는 사람이 됐다.
실패를 자주 체험하니 내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도 알게 됐다. 물론 오래전부터 알던 사실이다. 하지만 예전엔 브라운관으로 종종 확인하던 이야기를 이젠 4K Full HD TV로 매 순간 확인하는 기분이랄까. 내 존재를 폄하하는 건 아니다. 이 세상에서 내가 컨트롤할 수 있는 영역이 얼마나 협소한지, 내 능력이 얼마나 허약한지를 더 선명하게 보게 됐을 뿐이다. 그래서 알게 됐다. 얼마나 더 겸손해야 하는지, 얼마나 더 노력해야 하는지, 얼마나 더 하나님을 의지해야 하는지.
실패의 정체도 요만큼 더 알게 됐다. 실패는 '이상'한 것이 아니라 '일상'에 더 가깝다는 것을 피부로 체득할 수 있었다. 실패를 만나서 불쾌할지언정 놀랄 필요는 없다는 걸 삶으로 이해하게 됐다.
실패가 지나치게 반복될 땐 다른 사람들의 실패담을 찾아보기도 했다. 그들의 실패담을 보며 나의 실패는 귀여운 수준이라는 걸 알게 됐다. 지금까지 이모티콘에서 130번의 불합격을 받았다. 많은 시간과 노동력, 내 육체가 축났다. 하지만 이 실패들 때문에 금전적인 빚을 지거나 다른 사람에게 손해를 입히진 않았다. 반면 이 세상엔 생명이 위태로워지거나 수백억의 빚을 지는 식의 거대한 실패도 존재한다. 나의 성취뿐 아니라 나의 실패 역시 작다는 걸 알게 됐다.
실패담은 가끔 찾아봐도 성공담은 굳이 찾아보지 않는다. 더 이룬 사람과 나를 비교하고 싶지 않아서이다. 하지만 손수 뒤져보지 않아도 성공담이 심심찮게 눈에 들어온다. 며칠 전에도 포털 뉴스 메인 화면에 인기 이모티콘 작가의 인터뷰가 실렸다. 최상위권의 인기 작가들이었다. "누구나 쉽게 도전할 수 있습니다. 억대 연봉을 벌고 있습니다." 쓱 훑어본 기사엔 여러 번 들은 이야기가 반복되고 있었다.
가수라고 다 BTS가 아니듯 이모티콘 작가라고 모두 탑 급은 아니다. 순위권에서 안드로메다만큼 떨어진 나 같은 무명작가는 수익이 적고 불안정하다. 자리를 잡았다고 말할 정도가 못된다. 하지만 불안정한 현재의 내 상태는 하나님의 도우심과 나의 최선으로 맺은 소중한 열매이다. 다른 사람의 열매가 거대하다고 한들 그것이 나의 기준이 될 이유는 없다. 남과 비교해서 내 열매를 아쉬워할 필요 역시 없다.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동시에 하나님이 주신 오늘의 몫에 감사하고 싶다.
이모티콘을 그리는 실력도 조금씩 나아지고 있다. 최근 석 달 내내 미승인만 받았지만 탈락이 곧 퇴보는 아니었다. 나는 내 그림의 어제와 오늘의 변화를 목격한 유일한 사람이다. 눈이 빨개지도록 그림을 쳐다보고 분석하면서 하루하루 미세하게 나아지는 걸 느낀다. 발로 성큼성큼 걷지 못하고 손가락으로 깨작깨작 그리기에 나의 전진은 느리다. 그러나 분명 앞으로 걸어가고 있다. 하루에 1 픽셀 만큼씩이라도.
실패에 대해 배웠고 실패를 버티는 힘을 기른 한 해였다. 노력하고 애쓰면서도 내 처지에 만족하는 법을 배웠다. 불합격 속에서도 그림이 조금씩 나아지고 있다. 때로는 힘들었지만 1년의 마침표를 찍는 지금, 진심으로 말할 수 있다. 많이 실패해서 감사했노라고.
하나님 정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