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수면 마비(가위눌림)가 찾아왔다. 뭔 꿈인지 기억도 안 나는 꿈속에서 온갖 애를 쓰며 허우적거렸다. 마침내 소리를 꽥 지르며 겨우 깼다. 그러고서도 얼마간은 정신을 못 차리고 잠꼬대 같은 말을 중얼거렸던 것 같다. 1,2분 후에 정신이 들었다. '아... 또 수면 마비에 걸렸다가 깨어났구나.' 의식이 현실로 완전히 넘어오면 비로소 민망해진다. 식구들이 나 때문에 깼을까 봐. 다행히 온 집안이 고요했다. 다들 잘 자는 눈치였다.
아침에 남편에게 밤에 무슨 소리 못 들었냐고 물어봤다. 아무것도 못 들었단다. 소리 지른 게 육성이 아니라 꿈속이었을지 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쨌거나 안심이었다.
그런데 저녁이 다 돼서 막내가 이렇게 털어놓는 것이었다. "음... 엄마가 어젯밤에 소리 질러서 깼어요."
갑작스러운 피해자의 등장. 너무 당황스러웠다. "어머, 그게 꿈이었는지 실제였는지 긴가민가했는데 엄마가 진짜로 소리를 지른 거였구나. 너무 미안해. 많이 놀랐지?" 막내는 어색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음, 그다음에도 엄마가 말을 했어요. '여보', '왜?'라고요. 뭔가 엉뚱한 말이어서 기억이 나요." 나는 전혀 기억나지 않는 대사이건만 막내의 귀엔 각인돼버렸나 보다. 재차 사과하며 아이를 안아주었다. 그리고 설명해 주었다.
"그건 수면 마비라는 거야. 자다가 슬쩍 깨긴 했는데 몸은 움직여지지 않는 증상이지. 엄마의 경우엔 몸을 버둥거리거나 소리를 지르면 수면 마비에서 풀려. 수면 마비는 너무 피곤할 때 가끔 겪을 수 있어. 엄마가 화가 났다거나 아파서 소리를 지른 건 아니야. 만약 엄마가 또 그러더라도 무서워하지 말고 '엄마가 좀 피곤했구나, 수면 마비에 걸렸다가 깨어났나 보네'라고 생각한 후 다시 자면 돼."
살짝 얼은 표정으로 내 말을 유심히 듣던 막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말했다. "음, 엄마가 밤에 그럴 때마다 심장이 쿵쿵 뛰어요."
'그럴 때마다'라니... 어제 밤 만이 아니었구나. 여러 번 들었구나. 오밤중에 얼마나 놀라고 두려웠을까. 나는 아이들에게 소리 지르지 않는 편이다. 겉으로 드러나는 감정 표현도 격하지 않다. 목소리도 작다. 그런 내가 뜬금없이 한밤중에 고함치는 걸 들었으니 아이 입장에선 꽤 섬뜩했을 테다.
한 달에 한두 번 정도 수면 마비를 겪는다. 그러나 내가 어릴 때 엄마는 하루가 멀다 하고 가위에 눌리셨다. 그때마다 '저러다 엄마가 죽는 건 아닐까'하는 공포에 떨었다. '수면 마비'라는 말 대신 '가위눌림'이라는 으스스 한 용어를 쓰던 시절이기도 했고, 엄마가 밤에 왜 저렇게 고통스럽게 비명을 지르고 몸을 버둥거리는지 누구도 설명해 주지 않았다. 게다가 우리 집안 분위기에선 내 감정이나 사소한(또는 심각한) 궁금증을 쉽게 털어놓을 수 없었다. 어쩔 수 없이, 어린 나는 엄마의 죽음을 상상하며 불필요한 불안을 앓아야 했다.
심장이 쿵쿵 뛰었다는 막내의 말에 수십 년 전의 경험이 오버랩됐다. 다시 한번 아이를 꽉 안아주었다. 머리와 등을 쓸어주며 아이를 안심시켰다. 엄마가 요란하게 소리 질렀지만 별일 아니야, 아무것도 아니야, 무서워할 필요 없어.
다음에 또 이런 일이 생긴다면 그땐 꼭 막내를 확인해 봐야겠다. 나 때문에 깼으면서도 그저 숨죽이며 가만히 떨고 있을지도 모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