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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 잡아먹는 게 있다

by 녹차

거대 탈지면 같은 안개가 산책로를 잡아먹었다. 일교차가 큰 요맘때 아침이면 꼭 이런 식이다. 안개가 붐비는 산책로를 걷노라면 몇 년 내내 한 번도 닦지 않은 안경을 낀 기분이 든다. 안개는 닥치는 대로 삼킨다. 형태도 삼키고 색깔도 삼킨다, 위치와 빛마저 가로챈다. 그런 안개도 못 먹는 게 하나 있는데 바로 거미줄이다. 다른 모든 것들이 안개로 지워질 때 거미줄은 자신을 드러낸다. 두툼한 안개의 위력이 얄브스름한 거미줄에 맥없이 걸린다. 거미줄은 자기보다 수백수천 배 무거운 안개 물방울들을 가뿐하게 붙잡는다. 안개에 묻힌 산책로에서 오직 거미줄만이 또렷해진다. 보석 목걸이처럼 윤을 내며 살아남는다. 얄브르슴하고 가냘픈 또 다른 존재들에게 용기를 주려는 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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