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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녹차 Oct 08. 2022

꾸역꾸역 살았지만 그래도 잘했다.


토요일 아침. 눈을 떴는데 아무것도 하기 싫었다. 일어나기조차 싫었다. 6일간 쌓인 피로와 오늘 해야 할 일의 목록들이 마음을 울적하게 눌렀다. 프리랜서이자 주부인 나는 평일보다 토요일이 더 바쁘다. 아이들이 집에 있는 날엔 아무래도 그렇다.


의욕 없이 몸을 움직이니 정신이 가출했다. 산책로에 갔더니 걷는 게 귀찮았다. 잔디밭에 누워 구름 구경이나 하고 싶었다. 건강식을 차려 먹는 대신 초코과자나 콱콱 씹어먹고 싶었고, 그림을 그리는 대신 여행이나 훌훌 떠나고 싶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의지만 없진 않았다. 직무유기를 할 담력도 없었다. 온 마음을 다해 임무를 수행할 텐션은 없지만 어떻게든 오늘만 버텨보자고 나를 구슬릴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조금 전에 오늘 자 to do list에 적힌 열한 개의 항목을 완료했다. 등 뒤로 왔다 갔다 하는 아이들의 인기척과 소음과 간섭으로 반 미쳐버릴 것 같은 멘탈을 붙잡고 5시간 동안 그림을 그렸다. 갓 만든 빵을 냉장고에 채워놨고 쌓인 세탁물을 빨아 널었다. 9,689걸음을 걸었고 밥상도 차렸다. 집중할 수도 없었고 집중하지도 못한 하루였지만 꾸역꾸역 완주했다. 


방긋방긋 웃으며 감사하는 하루를 살지 못했다. 아침에 읽은 전도서 말씀인 "하나님의 선물은... 자기의 수고에서 만족을 느끼는 것이다."에도 순종하지 못했다. 힘차게 살지 못했다. 즐기며 살지도 못했다. 


그래도 나는 내 어깨를 두드려주고 싶다. 한숨도 많이 쉬었고 의자 머리 받침에 뒤통수를 여러 번 갖다 박기도 했지만 그래도 하루를 살아냈다. 모범답안과는 거리가 먼 모습이었지만 이게 오늘의 최선이었다. 나에게 괜찮다고, 잘했다고 말해주고 싶다. 


내일은 하나님이 허락하신 안식의 날, 주일이다. 하나님 품에 아기처럼 안겨 푹 쉴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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