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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녹차 Oct 13. 2020

징징거림과 통곡을 견디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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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집 초등학생들은 자기 장난감을 스스로 정리한다. 잘 안 가지고 노는 장난감이나 책이 생기면 알아서 추려내고 그중 멀쩡한 건 사촌에게 물려준다. 한때는 어른 한 명도 들어갈 넓은 수납함 안에 장난감이 가득했던 적도 있었다. 필요한 것만 남기는 과정에서 그 수납장은 수년 전 우리 집을 떠났다. 얼마 남지 않은 장난감은 아이들 책상 서랍으로 들어갔다. 장난감이 별로 없다며 박탈감 느끼긴커녕 몇 개의 장난감으로도 잘 논다. 요즘은 장난감보단 둘이서 재밌는 놀이를 만들어 내며 노는 걸 더 좋아한다. 치우라고 잔소리하는 어른과 정리하기 싫어하는 아이의 기싸움은 우리 집에 없다. 그러나 이런 상태가 되기까지 길고 험난한 시간을 지나야 했다.


장난감 정리를 가르친 건 첫아이가 돌이 되기 전부터이다. 하루 종일 자유롭게 어지르며 놀게 내어버려두다가도 자기 전엔 반드시 정리하게 했다. 처음엔 아가의 손을 잡고 "00야, 이 곰돌이의 집은 여기야~."라며 알려줬다. 그 즈음의 아기는 물건을 손에 쥐고 옮길 수 있고, 어느 정도 말을 알아들을 수 있다. 물리적으로 장난감 정리 교육이 충분히 가능한 때이다. 


방법과 규칙은 간단하다.

유일한 방법: 장난감을 수납함에 넣는다.

규칙 하나: 장난감 정리가 하기 싫다면 장난감을 가지고 놀 자격이 없다.

규칙 둘: 아이가 아플 때 말곤 부모가 대신해 주지 않는다.


이제 이걸 매일 하기만 하면 된다. 그러면 되는데, 매일 때려치우고 싶었다. 내가 해버리면 몇 분도 안 걸릴 일을 꾹 참으면서 언제까지 지루한 생 쇼를 관람해야 하나? 인생은 무엇인가? 밤마다 인간 세계와 삶의 본질을 사유했다.


여기서 잠깐 우리 아이들의 주특기를 소개해야겠다. 우리 아이들은 우는 데 있어서 독자적인 경지를 이뤘다. 예민해서 작은 일에 울고, 오래 울고, 엄청난 데시벨로 운다.


첫 애를 낳고 산후조리원에 있을 때, 밤이 되면 신생아실에서 자꾸 전화가 왔다. "여기 신생아실인데 아무리 해도 애가 달래지질 않아요. 산모님께서 좀 와보실래요?" 베테랑 간호사님들도 달래지 못했다. 임신 기간에 육아 서적을 스무 권 가까이 줄치며 공부한 나도 달랠 수 없었다. 몸조리는 언감생심, 밤마다 자지러지게 우는 아기를 보며 '왜 아기는 뱃속에서 말을 배우지 못하는가'라는 의문이 솟았다. 큰애의 평소 울음소리를 처음 들은 어느 중년의 지인분은 아기가 많이 아픈 것 같으니 빨리 입원시키라고 하셨다(아이 둘 다 지금껏 흔한 입원 한번 한적 없이 건강하다). 언젠간 그리 가깝지도 않은 어느 지인이 "우리 애가 저렇게 울면 난 못 키워요"라고 면전에서 말했었다. 마음이 좋지 않았다.


아이들은 시시때때로 울었다. 잠들기 전에도, 깨어날 때에도 울었다. 특히 큰애는 태어나서 3년 정도를 매일 밤  두 시간씩 울고서 잠을 잤다. 누가 아기 울음을 "응애 응애"라고 했나? 우리 아기는 울음소리는 "우와아아악! 꺄아아아악!". 기저귀는 보송했고, 배도 불렀고, 아픈 곳도 없었다. 절대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은, 심적·육체적 고문 같은 시간이다. 아기를 키우는 게 이런 건 줄 알았으면 안 낳았을 거란 생각을 죄스럽게도 자주 했다. 하루는 너무 힘들어서, 우는 애를 놔두고 현관문을 열고 나가 문 앞에 쪼그리고 앉아 5분 정도 멍을 때렸다. 째지는 울음소리를 요만큼만 더 들어도 내가 찢어져 버릴 것 같았다. 하지만 별 수없이 다시 울음 속으로 터덜터덜 돌아갈 수밖에 없었던 그 3년...


상황이 이러니, 같은 주택 건물에 사는 이웃들은 당연하고 같은 골목 주민들까지 모두 우리 아이 울음소리를 알았다. 뛰는 소리가 아닌 울음소리 때문에 층간 소음 가해자가 되었고, 애 좀 그만 울리라는 아래층의 항의를 여러 번 받았다. 민폐도 보통 민폐가 아니었을거다. 허리를 거푸 숙이며 사과드렸다. 그러면서도 마음속으론 "내가 울린 거 아니에요. 그냥 이런 애들이에요. 나도 미쳐버리겠어요. "라고 말하고 싶었다. 어린이집, 유치원, 초등학교 선생님들도 모두 우리 애들 울음을 처음 접하셨을 때마다 충격을 받으셨다. 아이를 데리러 온 나를 측은한 표정으로 쳐다보셨다. 그렇게 우리 아이들은 어딜 가나 우는 걸로 대단한 아이들로 통하게 됐다.


이런 아이들에게 밤마다 정리 교육을 시켜야 했다. 교육을 진행하다 보니 나는 현대 의학이 풀 수 없는 신비로 등극했다.  의사선생님, 저는 머리 뚜껑이 수백 번 열렸는데도 멀쩡히 살아있답니다.


장난감 정리는 저녁에 했다. 하루의 피로가 쌓인 시간이다 보니 아이들의 잠투정까지 겹치면 긴장감이 두 배. 유아기의 매일 밤, 아이들은 자신의 재능을 십분 발휘했다. 목을 긁어대며 록 페스티벌을 열어젖혔다. '정리 못하겠다, 하기 싫다, 이건 내가 어지른 게 아니다, 엄마가 대신 해달라'라는 가사로 된 애들 애창곡은 왜 금지곡이 아닌 것인가. 기타도 아니면서 어찌나 징징거리는지 진상, 진상, 그런 진상이 없었다. 돌아버릴 것 같았다.


그러나 나는 내 역할이 이 모든 통곡을 꾹 참고, 정신을 붙들고, 화내지 않으면서 원칙을 지키는 거라고 생각했다.


아이들이 정리하기 싫다고 하면 윽박지르는 대신 외워둔 멘트를 AI처럼 차분하게 시전한다. "정리하기 싫으면 장난감을 가지고 놀 자격이 없으니 엄마가 버려줄게." 이러면 아이들이 움찔하면서 정리를 하... 기는 개뿔. 더 격렬히 운다, 더. 그러면 나는 종량제 봉투에 장난감을 주섬주섬 집어넣으며 두 번째 멘트를 장전한다. "장난감은 즐겁게 가지고 놀라고 준 것인데, 장난감 때문에 이렇게 화내고 짜증 낸다면 이건 더 이상 필요 없어." 그제야 아이들이 울음이 통하지 않음을 알고 "정리할게요~ 버리지 마세요~"라며 내 소매를 붙잡는다. 


이런 과정을 4~5년 이어가면 아이들이 정리의 달인이 되... 기는 개뿔. 정리의 번거로움과 귀찮음을 충분히 느끼게 된다. 그때가 바로 장난감 정리 교육의 두 번째 라운드를 시작할 순간이다. 장난감을 여기저기서 많이 받아서 수납함이 닫히지 않을 정도로 많아졌을 때, 너무 많아서 정리를 해도 해도 끝이 보이지 않아서 아이들이 힘들어할 때, 이때가 '비우기'를 시작할 적기이다.

이때도 감정이 담긴 잔소리는 필요 없다. 담백한 한 마디면 된다. "장난감이 너무 많아서 정리하는 게 힘들고 수납함도 비좁구나. 잘 안 가지고 노는 장난감을 사촌에게 물려주면 어떨까? " 

수년간 매일 저녁 스스로 장난감을 정리하며 이것이 얼마나 힘든 노동인지 아는 아이들이라면 '비우기'라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거부감 없이 받아들인다. 비울 것과 남길 것을 고르는 건 전적으로 아이의 선택이다. 나는 절대 간섭하지 않는다.


아이들이 스스로의 정리와 비우기에 익숙해졌을 때, 나는 1 in- 1 out 을 제안했다. 새 장난감이 하나 생기면, 가진 것 중 하나를 비우는 식이다. 이것 역시 거부감 없이 받아들여졌다. 일사천리로 장난감 양이 조절됐다. 물건이 적으면 정리가 쉽고 빨라지며, 빈 공간이 주는 쾌적함까지 더해진다. 아이들은 만족했다.


나는 미니멀라이프를 좋아한다. 하지만 훗날 아이들이 자라서 맥시멀리스트가 되어도 상관없다. 그건 아이들의 취향이고 삶이기 때문이다. 멘탈을 꽉 붙들고 아이들이 장난감 정리를 스스로 할 수 있을 때까지 가르친 건 '정리 정돈은 필수이며 물건이 적은 게 좋다'는데 강조점이 있지 않았다. 자기 일에 자기가 책임질 줄 아는 사람, 자립심 있는 사람이 되길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비우기'를 접목시킨 것은 되도록 쉽게 정리할 수 있는 하나의 기술이었을 뿐이다. 


그런데, 정리 교육할 때 '원칙을 지키는 것'보다 더 어려운 것이 있었다. '따뜻한 엄마'가 되는 것이었다. 아이들이 순순히 정리하지 않아도 화내거나 소리 지르지 않으려고 애썼다. 함께 놀고, 많이 안아주고, 같이 이야기하고, 귀담아 들어주고, 눈을 맞춰주고, 웃어주고, 귀여워해 주고, 귀찮아하지 않으려고 허덕거리며 노력했다. 흡사 맨틀 정도 깊이에서부터 사랑을 시추해내야 했다. 나는 그다지 사랑이 많은 사람이 아니다.  마음의 근육이 부들부들 떨리도록 힘을 써야 이런 것들을 겨우 할 수 있었다. 

사랑의 관계가 없인 그 어떤 교육도 아이에게 진정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그렇다고 사랑은 무엇을 위한 수단이 아닌 그 자체로 목적이다. 아이들과의 사랑은 무엇보다 우선되어야 했다. 마음 한 쪽이 여전히 차가운 나는, '따뜻한 엄마'가 되게 해 달라고 사랑이신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한다. 


장난감 정리 교육을 시작하고 대략 8년이 넘어가서야 저녁시간의 울음소리가 사라졌다. 그 기간이 절대 완벽하거나 아름답지만은 않았다. 나는 때로 화를 냈다. 아이들의 저항은 때로 가관이었다. 하지만 8년을 견디고 그 후 몇 년이 더 흐른 지금, 저녁 시간은 비현실적으로 평온하다.


스스로 정리하는 힘을 길렀더니 그 힘은 자연스럽게 다른 영역으로도 확장되었다. 요사이 밤이 되면, 아이들은 정리를 포함한 자기 할 일을 마무리한다. 각자의 이불을 펴고 모기장을 펼친다. 잠자리에 들기 위해 필요한 다양한 노동을 전혀 도와주지 않는 나에게 와서 "엄마 잘 자요, 사랑해요, 좋은 꿈 꿔요, 고마워요(+뽀뽀)"라는 달콤한 발라드 가사 같은 인사를 해준다. 나를 미치게 했던 울음소리가 10여 년 후 사랑의 고백으로 바뀌게 될 줄 몰랐다. 아이들 스스로 하는 일이 많아지니 내게도 조금씩 시간이 생겨서 그림과 글을 끄적이게도 되었다.


마지막으로 '자립심과 공부가 만나면 자기주도학습이 된다.'라는 말이 오피셜이라면, '녹차네 집 애들은 자기주도학습을 발휘하여 학교 공부를 척척하겠구나!'라는 추측은 뇌피셜이라는 말도 사알짝 덧붙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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